회의적인 생각을 회의하며 회의에 빠지다
회의
1. 의심을 품음. 또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심.
2. (철학)충분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하고 있는 상태
3. (철학)상식적으로 자명한 일이나 전통적인 권위를 긍정하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태도로 의심하여 보는 일. 이러한 태도는 철학적 정신의 근본이 된다.
- 표준국어대사전
잠에서 깬지 이제 한 시간 남짓 지났다. 낮잠이 아니다. 메인 수면이다. 정신을 깨기 위해서 산책 겸 흡연을 하면서 문득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자주 쓰는 것 '같고'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는, '회의'라는 단어. 사전적 정의에는 기본적으로 '의심'이 바탕이 되어 있다. 사전의 내용을 읽으면서 세 가지 뜻 중에 나는 어떤 의미를 자주 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는 회의적이다. 회의적인 인간이다. 어쩌면 이런 내 태도는 일종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자기분석을 하면 그렇다. 일정 부분 인정하는 바다. 이것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세상의 대부분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태도의 양면성 또한 별다를 게 없다.
내가 왜 이 단어를 떠올렸을까. 집을 나서면서 '인간은 과연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 대해 '회의적인' 나에게 이 말은 대체로 '그렇다'였다.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보다는 관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이 회의적인 생각에 대해 '회의'를 하면서 '회의'에 빠졌다. 그동안 가졌던 생각에 대해 '충분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하고 있는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내가 심리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탐구욕이었다. 정확히는 인간으로 인한 고통, 즉 관계로 인한 고통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 무엇이고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 알아야 했다. 이 모든 걸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어쨌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이유에서 심리학과를 선택했고 지금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실마리는 얻었지만 딱 떨어지는 답을 얻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다른 포유류보다 한 개체로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오랜 시간동안 '의존적인' 인간이란 존재, 다른 종보다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복잡하고 경이로운 존재가 된 인간에 대해 정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의존적인'. 인간은 독립을 추구하지만 - 늘 그런건 아니지만 - 동시에 의존을 필요로 한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부모의 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양육을 통해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하지만 이 과정은 전적으로 의존적인 관계다. 또한 우리가 부모를 떠나 독립 혹은 자립을 한다해도 여전히 다른 인간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의존의 다른 형태로 유지되며 독립이라는 것 자체도 의존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라는 인식도 그렇다. 태어난 인간, 아기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의 세포에서 인간의 형태를 갖춘 아기는 자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응하는 존재다. 적절한 돌봄 없이는 삶을 이어갈 수 없다. 또한 주 양육자의 적절한 반영 없이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각이 형성될 수 없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자기 인식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내가 아는 나', '남이 아는 나',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 앞서 말했듯 아기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내가 아는 나'는 결국 '남이 아는 나'에서 출발한다. 주 양육자와의 애착에서, 가족 내에서의 관계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했는지가 자기 인식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이 처음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애착'은 매우 중요하며 그렇기에 심리학에서는 이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주 양육자와의 관계, 애착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형성한다. 즉 양육자의 반응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 - 긍정/부정 -가 형성이 되고 양육 방식에 따라 타인에 대한 태도 - 신뢰/불신 - 가 형성되며 최종적으로 세상에 대해 - 안전한가 - 평가를 내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탄생과 형성, 존재에 있어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의 연쇄 끝에서 나는 다시금 나의 회의적인 생각 - 인간의 관계에 대한 회의 - 으로 회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아기가 이유식을 먹다가 점차 밥을 먹는 것처럼 관계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인간 만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던 버트런드 러셀. 오늘도 1일 1물음표를 했으니 오늘은 그만 달고 밥이나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