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말아요 그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타인에게 걱정해주는 말을 건네거나 혹은 타인이 자신에게 그랬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걱정의 말은 대게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서 어떡하니"
뭐 걱정이라는 게 사실 관심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거라 좋게 말하면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지만 때로는 '오지랖'이 되기도 한다. 관심과 오지랖의 구분이 모호할 때가 많고 단순한 관심, 진정어린 애정보다는 참견, 훈수질(=꼰대질)이 될 수 있으니 세심한 배려와 주의가 필요하다.
내가 양극성 장애 환자가 된 이후로 걱정하는 말을 듣는 빈도가 상당히 늘었다.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거나 속으로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살겠으니 당신은 당신 인생이나 신경쓰세요'라고 말하며 넘겨버리지만 초기에는 정말 큰 스트레스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운 것도 한두 번이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걱정을 한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듣거나 여러 사람에게 '돌아가며' 듣는다면 이 괴로움은 한층 더해진다.
올해로 양극성 장애 6년차다. 치료 기간으로 따지면 그렇고 발병 시점으로 하면 7년째. 원래도 약물치료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기에 치료 초기부터 꾸준히 약 복용을 이어왔고 양극성 장애는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인 상태다. 요즘 들어서는 재발에 대한 걱정도 꽤 내려놨다. 재발이 되면 되는거고, 안 좋아지면 약을 더 먹든가 입원을 하면 된다. 중요한 건 삶에 대한 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면 그냥 살아가는 거다. 별거 없다.
사람들은 흔히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행복이나 최상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특히 웰빙이 단순히 몸의 건강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신의 건강까지 확대된 최근에는 더욱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은 "삶은 고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고통의 바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고 우리네 삶에서 문제가 없다는 건 지극히 예외적인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문제 없는 삶은 사실상 부질 없는, 헛된 희망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제가 아니다. 살면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리 잘 대비한다해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문제들, 예측 불가능한 것들은 늘 있다. 내게는 양극성 장애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문제들에는 합당한 해결책이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때는 그저 '존버'가 답이다. 체념과 비슷하지만 다른 '버티기' 말이다.
재발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게 된 건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줄스 에번스의 <삶을 사랑하는 기술>은 고대 그리스 철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스토아 철학, 소크라테스 등 우리가 흔히 아는 내용도 있지만 헤라클레이토스, 루푸스 같이 생소한 이름들과 철학들이 학교의 수업 형식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내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스토아 철학이었다.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불안해진다.”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자기 영혼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영역이 존재한다. 제 1영역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 같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 영역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제 2영역은 외부의 일로, 갑작스럽게 닥친 사고처럼 우리가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제 2영역에 대해 통제하려고 하거나 그것을 실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고통을 발생시킨다. 또한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제 1영역인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 피해의식, 책임회피, 남탓 등- 고통을 느낀다. 스토아 철학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회복탄력성과 정신건강을 얻기 위해서는 상황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 때문에 흥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을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특히 가능성은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걱정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걱정도 마찬가지다.
관심의 표현으로써의 걱정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문제 - 순수한 관심이 아닌 것들 - 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걱정의 무의미함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한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명절 풍경을 예로 들어보자. 명절이 되면 그동안 교류도 없던, 사실상 남이나 다름 없는 친척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꼭 한번 쯤은 나오는 말들이 있다. "취직을 못해서 어떡하니", "결혼을 못/안해서 어떡하니" 등 당사자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관심 - 이라기보다는 참견 및 꼰대질 - 이 그것이다. 할 말은 없는데 어른이니까 뭐라도 말하고 싶거나 그냥 훈수 좀 놓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저런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걱정에는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1도 없다는 것에 있다. 취직을 못해서, 결혼을 못한다고 걱정해주면 뭐가 달라질까? 일자리를 소개해주든지 힘내라고 용돈을 쥐어주거나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주면 모를까 말만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관심을 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저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여러 글에서 주장했듯, 할 말이 없으면 침묵하고 공감할 수 없으면 가만히 있는게 낫다.
타인에 대해 어떤 말을 할 때, 특히 걱정이나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할 때는 세심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떨까를 생각해보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없는 문제라면 가급적 말을 아끼는 게 좋다. 어설픈 충고나 위로보다는 침묵하거나 - 침묵은 금이다 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 진실한 공감 -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알고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 - 이 낫다.
상대방이 사랑으로 느껴야만 사랑인 것처럼 관심도 마찬가지다. 나는 관심이 있어서 걱정하는 말을 했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관심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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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 삶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 때문에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구실로 자신의 생각·행동·삶에서 행한 중요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책상에도 붙여 놓은 <삶을 사랑하는 기술> 내용인데 나만 알고 있기 아까워서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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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랑하는 기술>의 저자는 줄스 에반스다. 근데 왜 나는 줄리언 반스라고 기억하고 있었을까. 목차 찾으려고 검색해보지 않았으면 언제 알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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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으로 조회수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평소보다 3~4배 높아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조회수의 70% 정도가 <결혼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글이었고 유입경로의 90%가 브런치였는데 무슨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