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도 하고 또 그래야 하는
내 사고의 흐름은 다소 뜬금없다. 잘나가다 삼천포에 잘 빠진다. A를 생각하다가 B가 생각나고 자연스럽게 C로 주제가 옮겨진다. 그러다 문득 또 뜬금없이 Z가 의식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A와 B, C 그리고 Z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본다. 갑자기 Z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무의식이거나 직관적인 무언가가 Z를 밀어낸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바로 연관성이 떠오르거나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묵혀두었다가(?) 한참 뒤에나 '아 그때 그게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특히 어떤 일에 집중하지 않을 때 끊임없이 흐른다. 몰입하지 않을 때는 거의 항상 그렇다고 보면 된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의 제목처럼 말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까는 거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기다려보시라. 이제 본론이 시작될테니까.
이 글의 제목인 "예술가는 타고난 관심종자"라는 명제의 탄생은 앞서 말한 "뜬금포"의 산물이다. 오늘, 아니 어제 저녁에 낮잠 같은 저녁잠을 자고 일어날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관심종자'라는 말에는 '관심'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다소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 또한 문학이라는 예술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예술가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려고 이 말을 쓴 건 아니다. 다만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일 뿐이다.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매체를 통해 접하곤 한다. 워낙 다양한 분야가 있고 또 각자의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라 예술가라는 단어에는 대중 그리고 예술가 스스로의 다양한 생각과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테면, 예술가는 술을 좋아한다든가(그러다 술꾼으로 죽는다. 술은 절대 반지가 아니다) 영감이 오길 기다려야 한다든가(이건 정말 아니다. 영감은 찾으러 다녀야 하고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와야 한다) 성격이 괴팍하다든가(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나 이걸 구실로 무례하게 구는 예술가들은 그저 인격이 못된 거지 직업적 산물은 아니다)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관심종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예술가가 (타인의) 관심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직업'(=고고한 성직이 아님)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본다. 이 말에 반발심을 가질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예술가가 작품을 발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다. 조금 더 포장하면 소통의 욕구라고 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관심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을 부정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홀로 골방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절대로 발표하지 마시길 권한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성을 의미한다. 이 말의 뜻은 이렇다. 혼자 '예술'이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타인의 인정이 없다면 예술이라고 불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존재론적인 의의도 있겠으나 예술의 기원을 살펴본다면 그저 존재하기 위한 예술, 혼자 자기만족에 빠지기 위한 작품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E.H 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면, 예술은 "예술가와 대중의 대화"라 할 수 있다. 결국 예술을 '인정'하고 '향유'하는 대상이 있을 때야 비로소 그 존재 의미를 가진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대중성, 그리고 상업성에 대한 부정적인 예술계의 인식,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퍼져 있는 "가난한 예술가" 혹은 "헝그리 정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예술가 또한 엄연히 하나의 직업이다. 직업이란 무엇인가?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자 수단이다. 예술가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자기실현을 좀 더 하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직업을 뛰어넘는 의미를 가진다는 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예술이 일정 부분 상업성과 대중성을 가져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하고 또 인정해야 한다(여기서 상업성과 대중성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상업성이 있으면 대중성이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특정 계층에게만 수요가 있는 작품이라면 대중성이 부족할 수 있고 대중적이면서도 그것이 구매력을 동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나만의 예술을 하겠다, 예술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은 자기기만에 가깝다.
여기에는 예술은 예술가의 자기표현이다 라는 개념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단순한 자기표현이 예술이 된다는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일정 부분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1차적으로는 자기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차적으로 그것이 타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인상을 남기지 않고, 지갑을 열게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개인적인 체험과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예술이라는 형식, 수용 가능한 형태로 다듬지 않는 한 자기표현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
물론 이런 나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고 위험하다는 건 인정하다. 아주 많이 모호한 개념이긴 해도 예술성 또한 예술의 한 부분이고 자기표현 없는 예술은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으니까. 예술가가 '자기 것'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성과 상업성, 그리고 대중의 관심은 예술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이 문제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관심종자는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행동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체험을 예술의 형식으로 정제한 다음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이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작품에는 일정 부분 예술가가 투영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전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지금, 갈수록 '프라이버시'에 대한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예술가는 그 반대로 행동하는 셈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읽어줄 독자가 없다면 어디까지나 일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브런치에 이 글을 쓰는 것도 타인이 읽어주길 원해서니까. 표현의 욕구는 관심과 인정을 갈구한다는 뜻도 된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제발 예술성이니 뭐니 하면서 독불장군으로 굴지 말라. 또한 자기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예술이다 아니다 말하지도 말라. 그리고 예술가입네 하면서 어깨에 힘주지 말고 십자가를 진 사람처럼 폼 잡지 말자. 그저 '예술'이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한 사람, 하나의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는 거면 충분하다.
+나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을 추천한다. 많은 생각은 경우에 따라, 생각하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뭐, 세상사에 한쪽으로 치우친 게 얼마나 될까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