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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ubris

인간의 최대 자유는?

그건 바로 자살입니다

by Argo

스무 살 무렵 부터인지,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중1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나서 부터인 거 같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그 새의 세계이다.” 라는 문장에서, 무언가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나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나는 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의문과 생각이 많았던 나에게 이 문장은 화약고에 던져진 불씨와도 같았으리라.


그 당시의 나에게 알은 기존의 신념, 관습이었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천주교인 어머니와 개신교인 아버지의 만남으로, 그리고 어머니가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자연스럽게 유아기부터 쭉 교회에서 자랐고, 성직자를 지망하던 아버지와 독실한 어머니 덕분에 성경도 어려서부터 빡세게 교육받았다. 철저한 무신론자가 된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왠만한 신자보다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정도니까.


대기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내 삶에 스며들었던 종교는 내게 익숙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성경 자체의 모순과 교리적 맹점, 신자들의 삶의 불일치, 교회의 비합리성 등 갖가지 의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더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이런 의문에 대해 명쾌하게 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의 이런 의문을 죄악시하는 태도였다. 결국 나는 혼자 신학과 철학, 역사를 공부하며 내 의문을 풀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무신론이라는 자유를 획득했다.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이라고 말한다. 신이 준 생명을 인간이 포기한다는 것은 교만이라며. 그러나 나는 이 또한 신의 폭압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는다. 생의 시작이 내 의지가 아니었는데 그 끝까지 내 의지로 할 수 없다면, 인간의 자유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이밖에도 고통이니 죄이니 하는 신학적 문제도 넘쳐나지만, 그건 다음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삶에 투영함으로서 생을 살아간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가며 인간은 기존의 종교적 질서에서 이성과 합리에 의한 질서로 기준을 변경했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공로로 우리는 더 이상 폭압적인 종교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카뮈는 자살보다 부조리를 견디며 저항하며 사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그런 삶도 의미가 있지만, 더 나아가 스스로의 끝을 정하는 것도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어제 한 대학병원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대기하면서 두 노인을 봤다. 작업치료실에서 나온 그 두 노인은 휠체어에 기대어 퀭한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생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한 노인은 기도삽관을 하고 산소통을 연결해 숨을 쉬고 있었다. 두 노인을 보면서 도대체 저런 상황에서 생을 연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럴 만큼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행복하기 위해 산다면(나는 이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이 두 노인은 정말 행복할까?


조울증을 앓으면서, 나는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매일 자살을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쉽고 빠르게 죽을 수 있을지 연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고 밤에 눈을 감을 때는 내일은 반드시 죽는다는 다짐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나에게 자살은 실존적이고 현실의 문제였다. 깊은 절망과 조울증을 견디며 사는 삶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그 풀리지 않는 숙제 속에서 자살은 하나의 탈출구였다.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그간의 자살사고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약의 개수가 줄어들고 덩달아 부작용도 줄어들면서 조금씩 인지 기능이나 다른 기능들이 회복되고 그에 따라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그러면서 하고 싶었던 일,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이전의 절망이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했으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자살사고가 줄어든 것은 이상한게 아니다. 단지 약이 줄어들어서 자살사고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살이 인간의 최대 자유이며 권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 고해다. 고통은 인간을 단련시키고 성장과 성숙하도록 인도하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몰아넣기도 한다. 나 또한 유전적인, 생리학적인 요인 이외에 심각한 심리적 외상으로 인해 조울증이 발병했고, 수년간 심리치료를 받았음에도 그 외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 흉터들을 죽는 순간까지 마주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건, 단지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싶고, 삶의 정수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 나에게 산다는 건 고통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부작용으로 가득한 약을 먹고 늘 내 기분과 생각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지 의심하며 수면시간을 체크하고 남들 다 마시는 술도 않먹으면서 수십년을 살고 싶지 않다. 일종의 불치병인 조울증 - 조울증은 조울증만의 약이 없다. 내가 먹는 약도 간질약으로 나온 걸 조울증에도 효과가 있어서 쓰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정신질환도 그렇지만, 조울증도 완치란 없다. 평생 관리하고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다. 아직 병의 기전이나 약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정확히 규명된 바가 없다. 우울증이 영혼의 감기라고? 개소리다 - 속에서 삶을 견디느니 속 편하게 죽음과 결혼하는 게 낫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한다면 기꺼이 죽음과의 결혼식장에 들어갈 것이고, 만약 그 결혼식이 일찍 찾아온다 해도 나는 기쁘게 관을 향해 갈 것이다. 다음 달에 모 대학병원에서 호스피스 교육이 있는데, 그거 하면서 존엄사 서약도 할 거다. 연명 치료 거부였나? 어쨋든...


삶에는 의미가 없고 단지 우리가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뿐이라며, 인생의 의미를 묻는 건 시간낭비라고 조지프 켐벨은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나쓰메 소세키 또한 죽음이 고귀하다고 믿는다고 했다.

나에게 죽음은 고귀할 뿐만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며, 동시에 삶이라는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탈출시켜줄 해방자, 구원자이다. 나는 죽음을 고대한다. 아직 나는 스스로 삶을 끝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언젠가 그럴 날이 올 것임을 알고 있다. 티컴세의 시처럼, 나는 죽음을 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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