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래서, 아직은 살아있기
1.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한 지 꽤 됐다.
2.
독립적인 삶을 살았던 과거와 달리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비참함을 뒤로 하고
어쨌거나 살아가는 한 나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
3.
누군가 직접적으로
"당신이 짐이 됩니다." 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지 아닌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눈치'가 있기 마련이다.
형이나 엄마나 내게 내색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물심 양면으로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가 양극성 장애가 아니었다면 고려하지 않아도 됐어야 하는 것들.
한창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 외향성의 화신인 엄마는 외출을 거의 하지 못했다.
처음 입원했을 때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형이 찾아 왔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고마움보다 미안함이었다.
4.
지금도 한 달에 한 두번 집에 내려오는 형을 볼 때마다
반가움도 있지만 미안한 마음도 함께한다.
단지 재정적인 지원을 해줘서가 아니다.
이혼 후에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빠와
문제 가득한 친가를 장남/장손이라는 이유로
나와 엄마 대신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미안한 사람은 또 있다.
미안하기보다는 죄송함이다.
양극성 장애 이후 명절 때 친가와 외가 모두 가지 않는다.
친척들을 마주하는 상황도,
그들에게 나를 설명하는 것이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 모두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친가야 발을 끊은지 오래됐으니 상관없다만
외가는 늘 마음에 걸린다.
내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몸이 불편한 엄마를 위해 막내 삼촌이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지난 번과 달리 이번에는 혼자 집에 남기로 했다.
양극성 장애 발병 이후 혼자 며칠 동안 집에 있는 건 처음이다.
6.
언젠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이 있다.
직장인이 가슴 속에 사직서를 품고 다닌다면,
내게는 죽음이 그런 셈이다.
아무튼 내가 지금 당장 삶에게 사직서를 던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7.
언젠가 유서와 함께 장례비용을 남긴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장례비용을 남긴 그의 마음은 인상 깊게 남아있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최소한 내 장례비용은 남기고 가는 것,
더 나아가서는 내가 목표했던 바를 한 번이라도 이루는 것.
그래서 무기력하게 겨우 발버둥치다 끝난 게 아니라
비록 추락하기는 했어도 태양 가까이 갔던 이카루스로 기억되는 것.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약을 먹고 한쪽이라도 책을 읽고 1분이라도 걷고 한 줄이라도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8.
언젠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는 날이 오면,
재발에 대한 공포, 매 순간 재정신인지 점검하는 괴로움,
그리고
약을 챙겨 먹고 남들 보다 취약한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불안한 일상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수고에서 해방 될 때
나는 비로소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