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MBTI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애당초 심리학자나 정신과의사가 만든 것도 아닌지라 정신의학 영역에서는 제대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데 뭘...)
다만 이론적 배경인 융의 성격론은 탐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 융의 이론이 심리학 이론 중 난해하기로는 손에 꼽는데 그 이유는 융이 너무 천재라서...?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의 양대 산맥인 건 둘째 치더라도 일단 그의 이론에는 동서양의 철학을 비롯해 문화인류학 등 하나만 잘해도 엄지 척 받을 만한 분야들이 무지개처럼 모여 영롱한 자태(?)를 자랑한다.
그러니 탐구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별개로 넘나 어려운 것.
아무튼 그의 성격론으로 돌아가서, 그는 인간을 대체로 내향성과 외향성이라는 정신의 태도와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네 가지 기능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인간이 서로 상극 관계인 성향 중 하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정해진 것도, 정적인 것도 아니며 이 두 가지 성향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닌, 하나로 통일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성격론에서 말하고 싶었던 본질은 인간이 스스로의 성향을 알고 각각의 반대되는 성향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실현'으로 귀결되야 한다고 봤다.
(주의: 여기서 '자기 실현'과 '자아 실현'은 동의어가 아니에요...)
현재 한국에서 불고 있는 MBTI 광풍이 기업에서도 비중있게 다룬 다는 이야기에 기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MBTI는 인간의 한 단면만, 고정된 모습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경험에 따라 기타 여러 요인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다.
때문에 검사 당시에 내향형이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어떠한 계기를 통해 - 자존감의 회복이나 성공 경험으로 인한 자신감 획득 등 - 외향적인 면을 개발하거나 원래 유형이었던 외향형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외향형이라서 연구직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내향형이어서 영업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성격은 각각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고작 MBTI 따위로 직장이나 진로, 연애나 결혼 등을 결정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MBTI 유행을 알면 무덤에 있는 융이 뛰쳐 나올지도...?)
어릴 적부터 탐구심이 강했던 나는 몇 시간이고 쭈그려 앉아 개미의 이동을 관찰해 기록하기도 하고 툭하면 이건 왜 이러냐며 질문도 많이했다.
목이 쉴 때까지 책을 읽어준 엄마 덕분에 책도 어려서부터 자주, 많이 읽게 되었고 복잡하다 못해 바람잘 날 없던 성장기의 경험은 인간 이해에 눈을 뜨게 해줬다.
(10살 무렵 백 명이 넘는 사람들과 1년간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 훈련을 받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10번이 넘는 이사를 하며 초등학교는 3곳, 중학교는 2곳을 다니고 도시에서 섬으로, 섬에서 산골로 다시 산골에서 도시로 옮겨 다녀본 사람은? 여기에 성장환경과 사회경제적 배경이 180도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경험을 더하면...?)
그래서일까.
매번 MBTI 검사를 하면 극 내향형과 함께 극 직관형으로 나왔다.
어쩌면 내가 심리학과를 선택했던 이유 중에는 이런 성장과정과 타고난 성향도 있을지 모른다.
비록 지금은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났지만 한때 심리치료사를 준비했던 사람이다보니 대화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단어와 맥락 등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다보면 상대방의 말 속에서 찾은 숨은 의도나 무의식이 드러난 부분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채 말하는 감정의 이면이나 상처 등 심리나 정신의 영역과 관련된 중요한 부분을 알게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이따금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상대방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때, 부정적인 반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말이다.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카산드라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 누구도 타인이 자신이 몰랐던, 혹은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말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사람에게는 '역린'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내가 알게 된 진실을 숨기거나 약간의 힌트만 던지고 끝낸다.
진실을 말해준다해도 대부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남이 알려주는 것보다 스스로 인식하고 수용해야 소용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항상 입을 닫고 있는 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거나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을 때, 관계의 파탄을 각오하더라도 서로를 위해서 반드시 말해야 하는 진실은 조심스럽게 돌려서 혹은 쿠팡 로켓배송처럼 다이렉트로 꽂아 버린다.
나도 한때는 진실이 만능열쇠인 줄 알았고 그래서 선의에서 진실에 진심을 담아 보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오배송이나 반송(...), 환불 요청을 받게 되면서 진실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특히 인간은 진실을 원하면서도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만 진실로 인정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입에 두꺼운 필터를 달았다.
카산드라가 되기 싫은 나는 오늘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관심 속에 내가 알게 된 진실을 숨기는 무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극 직관형의 어린 시절 일화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점심을 학교에서 먹고 오게 되자 엄마한테 "내가 없어도 밥 시간 맞춰서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 내 말을 잘 들었으면 훨씬 건강했을 거라고 이따금 엄마가 말하곤 한다.
일중독과 완벽주의 성향 탓에 집안일이든 뭐든 간에 해야하는 일에 집중하다보면 끼니를 건너 뛰는 건 다반사인 엄마의 성향을 9살짜리 꼬꼬마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놀랍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