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아직 살아있네요
1.
마지막 글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찾아보면 되겠지, 근데 귀찮으니 안할래ㅋㅋ
2.
어, 음, 그...
사실 난 누군가가 어떻게 지내냐 혹은 요즘 어때? 라고 묻는 걸 정말 싫어한다.
상대방은 정말로 내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볼 수 있지만, 그걸 답해야 하는 나에게는 막막함으로 다가오니까.
그냥 살아 있어요~ 라고는 못하고, 애매하게 웃으면서 그럭저럭 지낸다는 말로 버틴다.
3.
언젠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그가 수필에 썼던 말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는 중병을 오랜 기간 앓고 있었고, 그 또한 나처럼 병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그는 요즘 병은 좀 어떠냐는 질문에,
"병은 아직 진행중입니다." 라고 답했다.
4.
근데 그걸 또 직접 말하는 건 다른 문제죠...
하핳...
나쓰메 센세, 당신은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하신겁니까-
5.
좋다, 나쁘다를 반복하고 내가 봐도 지지부진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일상의 연속 -
그게 내 인생이다.
10년째 이러고 있으니 스스로는 나름 적응이 됐고 체념과 타협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말하는 건 다른 문제, 너무 어려운 문제다.
6.
그래서 나는 아직은 살아 있다고 여기에 쓴다.
어떻게 지내는 지는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스스로도 잘 지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여기서 잘 지낸다는 건 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7.
코로나 이후로는 딱히 큰 건강의 문제는 없다.
문제는, '신규' 질환이 없다는 것.
골격근계는 여전히 안좋고 비염은 20년째 진행중.
거기에 신장이 나쁘다는 비보를 얹으면 내 건강 상태가 얼추 설명된다.
어, 그러니까 말이죠 매일 아프답니...다?
8.
아침에 일어날 때 정말 잘잤다, 혹은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9.
어어 하다보니 벌써 5월이 코앞이다.
와... 진짜 인생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닙니까...
가는데는 순서 없다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 건 왜일까?
10.
요즘 솔직히 말해서 정신줄 좀 놓고 살고 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아, 이 말은 철학적인 물음이 아니다.
그냥, 생활 양식? 그런 거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발병 이전과 이후의 삶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솔직히 말해서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자살하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바뀐 삶에 대해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거라고.
나도 가끔은, 때때로 이 괴리감 때문에 자살 생각을 하곤 한다.
10년의 시간도 부족한가 보다.
11.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쓰다가 재발이 불쑥 튀어나오거나 그런 열심이 재발을 부르기도 했다.
몇 번의 위기를 겪고 나서 얻은 결론 :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12.
오늘 아침에 4년 넘게 미루고 미루던 일을 해치웠다(?).
이렇게 쉬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하는 건데 왜 미뤘는지 모르겠다.
뭐, 코로나 때문에 그런 것도 있긴 한데...
귀찮음을 이기지 못한 내 잘못도 있다.
발병 이전에도 외출을 딱히 즐기지 않았던 나인데
발병 후에는 대인 기피증에 가깝도록 외출을 안한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사람이 많은 시간대를 피하고-
응, 그래요 저는 사람이 싫습니다아..............
13.
아. 그래서 그 일이 뭐냐면,
본적, 공식적인 용어로는 '등록기준지' 변경을 신청했다.
2008년인가에 법이 바뀌면서 호적이 가족관계증명서로 바뀌고 본적이 등록기준지로 변경되었다.
호주제 폐지와 연관이 있는데 그전에는 호주에 따라 등록기준지가 결정되었다.
라떼, 내가 태어났을 때는 아직 호주제가 팔팔하게 살아 있어서 지금까지 아빠의 등록기준지인 친가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 오늘 지금 주소로 변경 신청을 끝냈다.
엄마의 말, 변경 신청을 구청에 가서 해야 한다는 말을 고대로 믿고 있다가 발생한 불상사랄까.
근데 엄마... 그거 인터넷, 심지어 모바일로도 가능한 거였어......
공동인증서로 하려다 잘 안되길래 금융인증서로 하니까 5분도 안걸렸다.
인증서 문제로 1시간 고생한 건 빡치.......네요.
알아보니까 사법부가 행정부하는 대로 하기 싫어서 그렇다는데 암튼 간만에 인증서 때문에 애먹으니까 짜증났다.
14.
소감은, 시원섭섭은 아니고 시원하다.
그 전에 "아니 이렇게 쉽게 끝나는 걸 이제까지 안했다고?" 라는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경멸(?)과 다음부터는 잘하자는 다짐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아직 수리가 된 건 아니지만 신청한 것만으로도 그 인간과 연결된 고리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좋다는 말이에요.
15.
아빠는 틈만 나면 엄마한테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
근데 도움이 안됐던 건 아빠인데...?
내 인생에서 아빠라는 존재가 도움이 됐던 건 기껏해야 운전?
내 학비는 대부분 내가 부담했고 사교육도 못받았으니까 '교육' 항목에서 제외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책임을 제대로 진 적이 없으니까 그 부분도 낙제.
가정 폭력으로 점철된 내 과거로 보면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으니까 실격.
음, 그래서 제 점수는요, 100점 만점에 마이너스 100입니다.
16.
얼마전에 형한테 내 안부를 묻고 전화 차단한 거 해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데
그 말 들으니까 아, 아직도 이 인간이 정신을 못차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내가 그 사람이었으면 평생 속죄하면서 앞에 나타나지 않을텐데.
내가 발병 이후 세 번 입원한 이유에 당신이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한다는 걸 당신은 죽을 때도 모르겠지.
그걸 알면 그렇게 안 살았을테니까.
등록기준지 변경하면서 부자관계 변경도 가능한지 알아봤는데 불가능이란다.
뭐 전에도 알고는 있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까 답답하다.
혈연관계가 그렇게도 중요한 걸까.
아빠와 엄마의 관계를 보면서 아, 결국에 부부도 남이구나를 배웠다.
그리고 인간관계, 특히 결혼 생활에서 차이가 다름을 만들고 다름이 갈등이 된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아빠답지 않은 아빠를 보면서 남보다 못한 가족,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아빠가 있다는 것도 체험했다.
17.
아빠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18.
그래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
19.
틈틈이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고는 했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쓰고 싶은 내용도 있었고 실제로 얼마간 쓰기도 했는데 결국은 쓰지 못했다.
언젠가는 쓰겠지...? 미래의 내가 써 줄 거야 아마도.
20.
새벽에 일어나 맨유 경기를 보면서 느낀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역전 당한 순간 욕하면서 꺼버렸는데
다시보니까 동점이라고...?
그리고 두 골을 더 넣었어?
이겼네...?
지난 번 FA 컵도 2부 3:0으로 이기다가 삽시간에 세 골 처먹고 연장 후반 종료 직전 골 먹히는 거보고
아 이 *** ****!!!!!!
라고 외치며 꺼버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골취소에다 승부차기 끝에 승리했다.
오늘은 저번과 다르게 좀 정신을 차렸는지 두 골 더넣어서 깔끔...은 아니지만 어쨌든 4:2로 이겼다.
솔직히 홈인데 2골 먹힌 거, 그것도 꼴찌한테 먹힌 걸 생각하면 "이게 팀이야!!!!!"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겼으니까 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