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보다 '무엇을', '어떻게', '제대로'가 중요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나무야 나무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당신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새로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그저 달달 외워서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현실에 반영할 것인지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작가를 준비하기 이전부터 책을 꾸준히, 그리고 많이 읽어왔던터라 종종 주위에서 책을 추천해달라거나 어떻게 하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내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조언을 해주면서, 또 주변의 나름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을 보며 깨달은 건 독서도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책을 어떤 이유에서 읽든 - 스펙을 쌓기 위해서든, 자기계발을 위해서든, 그저 흥미에 의해서든, 그 무엇이든 - 상관없이 책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동기가 어떠하든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 자체는 매우 훌륭한 자세이고 동기야 읽다보면 변하기도 하니까, 딱히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조언을 할 때 말하는 몇 가지 주의사항 중 하나는 그저 '다독'을 위한 독서는 가급적 지양하라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통상적인 말과는 사뭇 다른 말이다. 그럼 나는 왜 '다독'을 경계하듯 말하는 걸까?
물론, 내 나름대로 세운 독서의 단계에 비춰보면 일정 수준에 이를 때까지 다독, 즉 다방면의 책을 고르게 많이 읽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독서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고전이니까, 베스트셀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좋다니까 무조건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는 너무 원대한 목표이자 금방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접근법이다. 고전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고전이 아니고 오히려 독서를 고전하게 만드는 책일수도 있다. 따라서 자기 수준에 맞는 책, 흥미를 유발하고 비교적 읽기 쉬운 책을 선택하되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다. 독서의 재미를 알아가는 수준에서는 그 정도면 적당하다. 차차 독서의 '맛'을 알게 되면 완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다 읽게 된다(어떤 책을 읽는데 너무 진도가 안나가고 읽기가 싫다면 그건 그 책의 수준이 너무 높거나 읽을 준비가 안된 경우다. 그럴 때는 잠시 내려놓고 나중에 다시 읽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술술 읽어질 때가 있다).
입문의 단계에서는 독서의 폭을 넓히는 단계다. 이른바 '저변의 확대'인데 건축으로 말한다면 기초공사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수준 높은 책들은 기초적인 내용을 알아야 읽기 쉬운 경우가 많다. 독서 입문자가 무작정 달려들기에는 어려운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그전에 기본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
학습심리학에서는 기억과 학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내용을 기억하려면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정보와 연결지어야 하며 기존의 정보가 많고 다양할수록 기억이 더 빠르고 쉽게 이뤄지며 더 오래 간다. 학습도 마찬가지인데 새로운 지식과 연결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지식을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 독서도 이 같은 과정을 거친다. 입문자가 다양한 책을 읽을수록 심화된 내용을 읽을 때 이해하기 쉬워진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역사서를 읽을 경우, 예전에 그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을 읽었다면 그 내용을 기반으로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서의 시작에서는 대게 '다독'이 권장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면 - 적어도 3가지 분야의 책을 기초 단계를 거쳤고 나름의 주관과 취향을 가졌다면 -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였다면, 그 다음은 알게 된 지식에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말에는 단순히 어떤 개념이나 대상에 대해 지식적으로 이해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해를 적용함으로써 체험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을 있어보이는 표현으로는 '지행합일'이라고도 하는데 - 원래는 더 깊은 철학적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앎과 행동은 하나'라는 의미로 씁니다 - '아는 것'이 그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앎과 행동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에 대한 책을 읽다가 스토아 학파의 주장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면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순간의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고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저 책을 많이 읽기만 하는 '다독'은 이런 깊은 이해와 실천을 등한시 할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배고픔에 아무 음식이나 폭식하다보면 소화불량을 비롯한 각종 문제가 생기듯. 독서의 목적 -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 을 상실한 다독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해가 된다.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표리부동함과 자칭 엘리트라는 자들이 저지른 일들을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지식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은 대표적인 경우이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 다독을 통해 독서에 흥미를 붙이고 방향을 잡았다면, 그때부터는 이전에 비해 느리고 적게 읽더라도 깊고 제대로 읽는 과정이 필요하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책을 자세히 뜯어보고 씹고 먹고 그것을 영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마음과 생각,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건 그저 시간만 낭비한 것에 불과하다. 책의 모든 내용을 소화시켜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나조차도 그러지 못하기에 감히 완벽한 실천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도록 노력하고 실제로 그런다면, 삶이 변할 뿐만 아니라 독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과정을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라고 부르며 스스로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무슨 인류 평화를 위한 공헌 같이 어마어마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방법의 중요성에 대해 읽었다면 오늘부터 말하는 방법을 바꿔보는 것(<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류쉬안), 매일 조금씩 운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는 것(<1일 20분 똑똑한 운동>, 그레첸 레이놀즈), 스마트폰이 인지능력과 학습수행능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읽었다면 짜투리 시간에 스마트폰 대신 책을 펴는 것(<딥 워크>, 칼 뉴포트), 이런 것들도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의 결과다.
책을 읽긴 읽는데 뭔가 모를 공허함과 부족함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가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양손 가득히 들고 있는 책을 내려 놓고 한 권의 책을 펼쳐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문장들을 음미해보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 단 하나라도 삶 속에서 배어 나오기 전까지는 다른 책을 잡지 말자.
이런 과정이 답답하고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만큼 당신의 영혼은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