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 나서
*11년 전이니 고2때 쓴 글이다. 생각보다 잘 썼고 내용도 깊어서 흐뭇(?)하다.
[2008. 10. 19. 21:56
22일 수요일에 있을 문예창작반 토론 대상인 서울, 1964년 겨울의 독후감. 쓰고나니 상당히 이상하다는... 왠지 평론같아 보인다.;;]
겨울을 사는 사람들
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 나서
****고등학교
2학년 3반
책 읽는 내내 ‘지루함’ 과 ‘허무함’이 나를 지배했다. 그들의 대화는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다. 마치 인터넷 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처럼 -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 가식적이고 표면적이었다.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 또한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의 가치와 존재는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풍경이나 아침에 이를 닦다가 무심코 보는 거울처럼, 존재하나 의미 부여의 대상이 아닌, 변두리일 뿐이다.
이 책에 대해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것을 지적하고 부각시키는 것은 나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논의 자체가 가치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없는 일을 행하기 전에 우리는 소설을 우리들과 대조해 보아야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와 연결 시켜보라. 뭔가 통하지 않는가? 오늘 나누었던 대화들이 '안'과' 나'의 대화처럼 쓸데없지 않았는가?
나는 이 책이 단순히 개인주의나 이기주의, 익명성이나 소외에 대해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화 속에서 보이는 양상을 통해 우리에게 좀더 구체적이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신의 황폐화’ 이다.
'안'과 '나'는 사내의 이야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내의 이야기는 자신과의 별개, 즉 다른 나라의 이야기다. 그가 자살했을 때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도망치는 그들의 행동은 개인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많은 요인에 의해 정신이 황폐화되고 감정이 거세된 것이다. 그들을 계절로 나타내면 칼날과도 같은 바람과 온몸을 난도질하는 추위가 지배하는 겨울일 것이다. 겨울을 사는 사람인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나무야 나무야’에서는" 따듯한 마음(warm heart)과 냉철한 이성(cold head)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은 비로소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인간’이 된다"고 했다. 허나 지금의 우리들은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듯한 마음도 결여 되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지금 우리네의 현실이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나에게 묻고 있다. 너는 겨울속에서 사는 사람인가? 나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대신 나에게 묻고 있다. '어디에 발을 딛고 서있는지' 말이다.
*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비판적인 태도, 문제의식이 있었던 거 같다. 문학 시간을 좋아하긴 했고, 성적도 좋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이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항상 작품에 대한 해석이 정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정답을 고르기 위해선 그 작품에 대한 해설을 '암기'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데도 그렇다고 생각해야 답을 맞출 수 있으니 자유로움과 나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중요시하는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그때 정말 좋아했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문장과 문체, 생각을 닮고 싶어서 필사도 했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때는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의 마음이었다. 불타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기랄까. 10년 뒤의 내가 10년 전의 나를 보는 느낌이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