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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에서 시작하는 완벽

by 누구니

며칠 전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 건으로 담임선생님이 처음으로 전화를 하셨다.

"실례지만 주민등본 상에 어머니가 안계신데 혹시 사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담담하게 이혼으로 근처에 따로 거주한다고 밝혔다.

선생님은 연신 죄송해하며...입학 지원서에 부모가 같이 동거하지 않는 사유를 적어야해서 그렇다며 전화를 끈었다.


회사 화장실에서 조용히 전화를 끈고 거울 속 내 얼굴을 마주하니 문득 "다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담임 선생님이 아들의 불완전한 가정 환경을 모르실 만큼 아들의 일상에 그늘이 없어보였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작년엔 '청소'를 선거 공약으로 걸었던 덕에 겨우 반장으로 뽑혔지만, 올해는 그런 공약 없이도 다시 반장이 되었다며 신나하던 아들...학교 친구 수십명을 전도한 덕에 교회에서 전도왕 2등도 했다며 행복해 하던 아들을 생각하니 괜시리 웃음이 났다.


매번 주위 사람들이 알게되면 어쩌나하고 조심냈던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가볍게 내뱉고 나니 한결 후련해졌다.

예전엔,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겪는지 내 현실이 서글플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점점 깨닫게 된다.

내가 가진 이 불완전함마저도 하나님이 나를 온전함으로 이끄시기 위해 만든 과정이라는 것을...


이혼 후 10년간 계속 백수로 지내온 전남편 덕에 나는 코로나 시절에도 계속 회사에 나갈 수 있었고, 얼마 전 딸아이가 독감에 걸려서 갑자기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도 그가 대신 병원에 동행해주었다.

얼마 전부터 전남편이 요리학원을 다닌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지만...아이들은 그런 아빠가 애써 만들어 온 떡과 오징어버터구이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워했다.

남들 눈에는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나름 최선을 다해주었기에 아이들은 밝고 구김없이 자라 주었고, 나또한 멈추지 않고 밤이든 주말이든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이 모든 상황이, 마치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온전히 해낼 수 있도록 내 현실을 일부러 조금 부족하게 만들어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주위의 시선과 나만의 슬픔에 빠져, 평범하지 않았던 내 삶이 망가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겨진 시간과 관계의 빈틈이 있었기에, 그공간을 다시 '새로운 나'로 채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 빈틈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새로운 온전함을 위해 달려갈 수 있음을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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