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혼의 주홍글씨?
이혼 후 10년 #19
“00일까지 첫 출근하는 게 가능하세요? 혹시 가족들도 다 같이 이사 오시나요? ”
"아... 저 이혼해서... 가족들이 같이 내려가진 않을 것 같아요."
첫 출근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전화한 상급자는 갑작스러운 나의 이혼 얘기에 다소 당황한 듯했다.
그때는 ‘저 이혼했어요’라는 말이 나에게 어떤 주홍글씨가 될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격주로 2박 3일씩 예정되어 있는 면접교섭일정을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고 조율하려면 내 사정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같은 팀에는 젊은 싱글 직원들이 많았기에 이런 나의 상황을 알고 대체로 열린 자세로 받아들여줬다.
“왜 그렇게 된 걸 얘기 안 했어? 나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계속 소개팅 시켜주려고 알아봤잖아!”
함께 입사한 100여 명의 동료들 중에 나와 연령대가 비슷한 현지 출신의 남자 직원이 있었다.
신입교육 때부터 인사처럼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던 그는 어디서 나의 이혼 소식을 들었는지 따지듯 물어왔다.
내가 소개팅을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먼저 '순도 100% 미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중히 밝히고 소개팅 따위는 언감생심이라고 펄쩍 뛰기라도 했어야 했나?라는 생각에 미치니 내 깊은 곳에서 불쾌감까지 올라왔다.
회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 간혹 정시에 퇴근하다 보면 직장 동료들과 종종 마주칠 때가 있다.
의례적으로 "어디에서 일하다 왔어요?"로 시작해서 "집이 어디예요?"로 끝나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새로운 직장은 서울에서 상당히 거리는 멀었지만, 근무조건이나 문화예술 환경 등이 좋아 초창기에 전국에서 꽤 잘 나가는 문화예술업계 사람들 대거 모여들었다.
든든한 재원과 질 좋은 인프라를 활용해 수준 높은 예술을 실현하고자 이직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평일에는 직장 근처에서 홀로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서울로 가는 기러기 아빠, 엄마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겪을 때도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상식 없기로 소문난... 옆 팀 상사가 그랬다. 출퇴근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애써 딴 길로 둘러가며 우리 집이 어느 방향인지조차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마주친 그는 나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음흉한 표정으로 농을 걸어왔다.
“OO 씨! OO씨집이 어딘 줄 내가 벌써 다 알고 있지! 우리 집에서 보면 00 씨 방 안이 다 보이더라고!"
심지어 몇 개월 뒤에는 이 상사와 같은 팀에 일하게 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충분히 성희롱으로 신고할 만했으나 매달 양육비를 감당하며, 아이들과 2박 3일 동안 있을 서울 집까지 유지하기 위해선 과감하게 용감한 신고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비정상적인 상사로부터 빨리 벗어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자격지심 때문인지... 미혼자들 사이에서도, 기혼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어쩐지 한 단계 낮게 취급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름 열려있는 문화예술계였지만, 이혼 여부에 따라 사람의 성격과 인성을 저울질하는 사람,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이상한 추파나 농담을 던지는 사람들... 나도 몰랐던 이혼의 주홍글씨를 마주하게 될 때마다 차라리 알리지 말걸 하는 생각을 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빨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나?
그때 내 나이는 아직 30대 중반, 일하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내가 그냥 미스인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이따금씩 '아직 젊을 때 새로운 인연을 찾아야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주말 근무 일정을 조율하다 보면 이런 생각조차 사치라는 현실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곤 했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일은 첫째, 셋째 금요일마다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 것! 그리고 월요일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무사히 출근하고 하루를 버티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행복보다는 '아이들에게 항상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최우선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