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혼 후에도 계속되는 내 인생
이혼 후 10년 #21
내 결혼은 실패했지만 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육아휴직 후, 이혼과 함께 주춤했던 내 커리어는 새로운 도시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감독님'이라고 불렸던 내 직함은 '프로듀서'라는 직함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다양한 상업공연과 축제에서 필요로 하는 무대기술 업무를 담당했다면, 이곳에서는 다양한 장르와 규모의 공연기획 업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엄청난 재원으로 건립된 대규모 국립센터였기에 거대한 예산의 지원 규모만큼이나 세상의 기대도 컸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감독이나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거나,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세계 최초를 표방하는 신선한 시도들이 많았다.
나는 공연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이나 축제 등의 기획업무를 했는데, 제작 전반에 대한 경력이 많아 단순 초청 공연보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제작하는 작품들을 주로 프로듀싱했다.
이 도시는 전통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내가 일하는 센터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 일 년 내내 다양한 문화 이벤트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일과 중에는 센터에서 펼쳐지는 세계적인 포럼이나 전시들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어, 가끔은 '저기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나를 일부러 이곳까지 공부하러 보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작품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들은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러 가지 않는 주말이나 평일에는 거의 연장근무를 하면서 제작계획을 짜거나 밀린 업무를 해야 했다.
그러다 힘이 들면 퇴근길에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들렀다.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교회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는 매일 새로운 성경구절이 나와있었다.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큰 위로를 받기도 하고, 더 힘들면 어두운 예배당에 홀로 앉아 쉬어가기도 했다.
그곳은 내게 주어진 크고 문제들을 유일하게 토로하고 원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말이면 많은 가족과 연인들이 센터를 찾아 공연과 전시를 즐겼다.
그래서 일요일에 나 홀로 출근을 하게 되면 더욱 외로웠다.
그럴 때면 나는 교회로 가서 영혼 없는 짧은 예배를 드리고,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왔다.
이유는... 주말 점심을 혼자 먹을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무엇보다 교회 국수가 맛있어서... 였다.
'비록 남들처럼 아이들과 주말 나들이를 가진 못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내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매번 교회 맨 뒷자리에 앉아 졸다가 오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가면 조금은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고통이 나에게 주어진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고통 후에는 내가 견뎌낸 만큼 꼭 성장해 있을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믿음 덕분에 나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생의 꿈을 좇을 수 있었다.
비록 내 결혼생활은 슬프게 막을 내렸지만 아직 내 인생의 막은 내리지 않았기에...
이 믿음을 애써 스스로에게 주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