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예상치 못한 인생의 기회
이혼 후 10년 #26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는지... 아니면 바로 고향으로 이직하는 게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직을 준비하는 동안 이력서도 정리하고 , 새로운 공연장에서의 기획안 준비도 열심히 했는데... 떨어지고 나니 생활 전반의 의욕이 많이 꺾인 듯했다.
그래도 매일 밤 확언 일기를 쓰는 건 빠뜨리지 않으며 다시 올 이직에 대한 희망을 꿈꿨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또다시 야외 축제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다가왔다.
나의 부서이동과 함께 축제 업무도 다시 이전 팀으로 옮겨왔다. 다행히 공연을 비롯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이해도와 열정이 있는 직원들과 함께 하게 되어 이전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
새로 영입한 프로그래머와 함께 다양한 출연진들과 부대 프로그램들을 기획하였다.
특별히 제3세계에서 초청한 예술단체들이 한 달 이상 국내에 머무르며 지역 어린이들에게 함께하는 그 세계의 음악과 문화를 알려주는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새롭게 준비했다.
동시에 지역 기업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문화상품을 만들기도 하고, 축제 관람객들을 위한 식음료와 푸드코너 준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최근 몇 년 간 그 야외축제에 음료를 협찬해 주는 기업이 있었다. 해당 기업의 실무사인 박실장님은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우리들의 디테일한 요청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기꺼이 응해주는 분이었다.
심지어 내가 두 번째로 맡게 된 해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레트로 음악 전시를 제안하며 운송료만 부담하면 무상으로 전시 작품을 임대해 주겠다는 민간 박물관도 소개해 주었다.
나는 팀원 몇 명과 함께 4시간 거리에 있는 그 민간 박물관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직접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전시품들을 보고, 세부적인 방향을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관광지 중심에 자리 잡은 음악 박물관은 한 기업가의 오래된 취미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예상과는 달리 전시 공간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음반과 소장품, 그리고 시대별 축음기 등이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우리의 축제와 시대나 콘셉트가 잘 어우러지는 전시작품들을 선정해서, 음악 관련 전시 코너로 운영하는 게 목적이었다.
중간에서 우리와 박물관을 연결해 준 박실장님이 함께 조율해 준 덕분에 모든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업무 회의 이후에는 음료 협찬사의 본사로 이동해 식음료 공장을 투어 하고, 직영으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맛있는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자리가 끝나고, 함께 온 팀원들은 센터가 있는 도시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다음 날이 주말이라 1시간 거리에 있는 고향집에 들렀다 출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교통수단을 검색해 보니 늦은 시간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괜찮으시면 시내까지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마침 저도 지점에 납품할 게 있어서요."
어떻게 갈지 검색하던 나를 잘 살피던 박실장님은 기꺼이 나의 ,부모님 댁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달리 집에 갈 방도가 없던 나는 감사하다며 그분의 차에 올랐다.
지금까지 협찬을 담당하는 우리 팀원이 동석한 회의는 많이 했었지만 그 분과의 사적인 대화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뮤지컬 좋아하시나 봐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차 안에서 갑자기 내가 함께 제작했었던 뮤지컬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많이 좋아해요. 서울에 있을 때는 거의 모든 뮤지컬들의 첫 공연을 보러다닐 만큼이요.”
박실장도 서울을 떠나 내가 이직한 그 도시로 내려오고 나서는 공연을 볼 기회가 많이 없어졌다며 아쉬워했다.
뮤지컬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내가 예전에 했던 공연 감독 일로 이어졌고, 그가 내가 작업했던 거의 모든 공연장에 관객으로 왔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각자가 다니던 대학도 가까운 곳에 있어 비슷한 시기를 근거리에서 보냈다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었다.
쉴 새 없이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저희 지점에 잠깐 들렀다 가실래요?
오늘 거기서 예전에 같이 일했던 공무원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당황했지만, 그 도시에서 일하는 공무원과 함께 본다는 이야기에 솔깃했다.
마침 그날은 아이들을 보는 날도 아니었고, 부모님 댁에 가더라도 특별한 일은 없었기에 알겠다고 답했다.
나는 새로운 장소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종종 즉흥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그런 계획에 없던 행동들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과 기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항상 좋은 결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도 나는 겁내지 않고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도에 마음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