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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보라 Dec 12. 2024

#27. 이혼에 대한 자격지심

이혼 후 10년 #27

내가 있는 지역으로 서울 뮤지컬팀이 투어공연을 온다고 연락이 왔다.  

누구와 공연을 보러 갈까 고민하다가 마침 박실장님이 떠올랐다.

덕분에 축제도 잘 마무리되었고, 일전에 부모님 댁까지 태워준 것도 고마운 마음에 함께 공연을 보자고 했다.

주말 저녁, 남자와 단둘이 보는 뮤지컬 공연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알 수 없는 설렘으로 약속 시간에 맞춰 준비를 했다.


"덕분에 재밌는 뮤지컬도 오랜만에 봤는데 제가 맛있는 저녁 살게요"  

박실장님이 오랜만에 즐긴 공연에 대한 답례로 저녁을 산다고 했다.

그는 지금 일을 하기 전에 10년 이상을 행정망을 구축하는 전자시스템 회사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덕분에 전국의 공무원들을 많이 알게 됐다고... 하지만 촉각을 다투는 그 일이 너무 힘이 들어서 지금은 전혀 다른 비즈니스에 뛰어들게 되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 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띄엄띄엄 연락을 이어가는 사이가 되었다.

"조금 있으면 회사 앞에 도착하는데 잠깐 나와보시겠어요?"

그는 가끔 회사 앞을 지나간다며 연락을 하고는 나에게 작은 선물들을 안겨주고 갔다.

'이게 뭐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든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회사에서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있던 날, 박실장님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제가 좀 오랫동안 출장을 가는데 가기 전에 뭐 좀 드리고 가려고요."

그는 오래전에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사왔다며 나에게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프로그램북을 선물로 내밀었다.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저한테 주세요? "

그 책은 단순한 프로그램북이 아니라 그 뮤지컬의 다양한 분야별 프로덕션 제작 일지와 역사를 담고 있는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한정판 프로그램북이어서 더욱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똑같은 책을 두권이나 사왔다며, 이제 주인을 만난 것 같아 선물을 주고 싶다며 나에게 책을 안겨주고 떠났다.

 

한참 동안 연락이 뜸하던 박실장님이 간만에 센터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다른 팀원한테 전해 들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잠시 인사라도 하러 갈까?'

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봐 이내 마음을 거두었다. 

"큰일 났어요! 박실장님이 집에 가시다가 계단에서 구르셨어요!"

미팅을 하러 나갔던 팀원들이 갑자기 뛰어들어오며 119에 급하게 신고다.  

알고 보니, 미팅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이동하던 박실장님이 계단을 헛디뎌서 다리가 완전히 꺾여버렸다고 했다.


우리 센터 건축 디자인이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출입구 위치와 계단들로 좀 복잡하게 되어 있긴 지만...그래도 자주 센터를 방문했었던 박실장님이 계단에서 떨어지다니 믿기 어려웠다.

119구급차에 실려간 박실장님은 근처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다.

같이 따라갔던 팀원이 다리 양쪽이 아예 부러져서 긴급 수술까지 받게 됐다며 걱정하며 돌아왔다.


119가 출동했을 때 나는 차마 현장에 나가볼 용기가 나않았다.  그래서 제법 시간이 흐른 후 따로 병문안을  하게 되었다.

막상 가보니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몇 개월이 소요될 만큼 상태는 심각했다.

괜히 우리 축제 때문에 다치시게 된 것 같아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말벗을 해주기 위해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행동이 좀 다르게 느껴졌다.   

박실장님은 하던 일도 쉬고, 병원 신세를 오랫동안 지게 됐음에도 택배나 퀵으로 다양한 선물들을 보내오며 나에게 어떤 마음을 전달하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병원에서 외로워서 그러겠거니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저런 말로 둘러대다가 급기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버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애가 둘이나 있어요..."

"저도 짐작은 했어요. 일전에 뮤지컬 같이 보러 같을 때 휴대폰에서 얼핏 애들 사진을 본 것 같아요."

헉... 나에게 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꾸준하게 마음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나는 어찌 됐든 애가 둘이나 있는 이혼녀가 아닌가?'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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