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10년 #39
새로 발령 난 자리는 근무 평정 점수 미달로 생긴 공석이었다. 다행히 팀원들은 나름 착하고 순수한 눈빛을 가진 어린 직원들이라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지난 2년 동안 개점휴업에 가까운 전임팀장의 나태함으로 모든 사업을 거의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새로운 팀원들과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상황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나, 업무가 많지는 않아 일로 인한 스트레스는 크게 없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녀의 소심한 신고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것에 감사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힘든 일을 함께 헤쳐나가며 함께 울고 웃는 동지 의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팀원들은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업무상 관계에 한정해서 대해야 했다.
지난 15년의 업무 경력 동안 경험했던 동료애는 이제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새로 만난 팀원들과 어떻게 적당한 거리를 두며 새로운 일을 도모해 나가느냐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총체적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어린 시절 엄마를 찾아다녔던 시장 입구에 있는 꽤 오래돼 보이는 정신과를 찾았다.
“왜 회사에서 친구를 만들려고 해요?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사람 사귀는 곳이 아니에요!”
40분 남짓 내가 가진 문제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의사는 무성의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잠은 잘 자요? 얼굴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필요하면 수면제 처방해 줄게요."
냉소적이다 못해 과하게 지혜로운 의사의 조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내가 여기에 애들 키우러 왔지... 사람 사귀러 온 건 아니지...’
나는 뭔가 홀린 사람처럼 병원을 나와 그 의사의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반복하며 오랜만에 어린 시절 거닐었던 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사람이 제일 많아 보이는 한 국밥집에 들러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저녁시간에 가까워져서인지, 인근에 사는 것 같은 가족 단위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에게 언제쯤 저런 평화롭고 평범한 저녁이 찾아올까?’
나 홀로 식어가는 돼지국밥을 마주하다가... 나도 모르게 다른 가족들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나에게 과도한 업무들을 몰아주고, 갑질 가해자로 몰아세웠던 상사들이 원망스러웠다. 어긋난 이해관계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회사 대표는 보이지 않았고, 그 아래에서 나를 조종했던 상사는 뒷짐을 지며 이 일에 본인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양 방관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내가 그토록 치열하게 쏟아부었던 노력은 온데간데없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만 오롯이 나에게 남게 된 것 같았다.
답답한 나는 새벽마다 교회를 나가 하나님께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따졌다.
“왜 서울보다 더 낯선 내 고향 땅에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나요?”
한참을 원망 섞인 눈물로 하나님과 독대를 하다가... 인근의 체육센터에서 짧은 수영과 샤워로 다시 무장을 하고 출근길에 나섰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무너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내가 이혼소송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속 마음은 무너질지언정, 일터에서 만나는 그 누구에게도 심적으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었다.
세상이 공격해 오면 올수록 더 단단히 맞서 이기겠다는 의지로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몇 개월이 흘러 회사에는 새로운 대표가 영입되었다. 그 사이, 나의 갑질 진위에 대한 조사와 인사위원회를 통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최종 결과를 나에게 얘기하기 위해 신임 대표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과거에 했었던 행동들은 주어진 업무를 잘 해내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만약 이 일로 인해 저에게 어떤 불합리한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저는 이 회사에서 열정을 다해 일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저에게 주어졌던 과도합 업무와 심적 스트레스 등을 문제 삼아 별도의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나는 다시 이 고향 땅에서 일을 못하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내뱉었다.
며칠 뒤, 공문을 통해 인사위원회의 조치 결과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좋은 사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단순한 주의 조치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사회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도 진실된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친구를 만들기 위한 곳이 아니다'라는 과격했던 그 정신과 의사의 조언이 마치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