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by 누구니


무기력증에 빠진 듯한 요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던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제는 그 ‘하고 싶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흐릿해졌다.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중 나를 완전히 주저앉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정신없이 치르고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한 기관에서 여성 중간관리자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그 자리에는 나 외에도 하루아침에 대리에서 팀장이 된, 우리 회사 유일의 여성 팀장도 함께했다.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는 여성 관리자의 현실, 그리고 남성과의 능력 인정 차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녀는 자신의 승진 사례를 예로 들며 회사의 ‘능력 중심 인사 시스템’을 극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근무 중 인사업무를 담당하던 중 팀장직에 있던 남자직원을 불미스러운 일로 자진 퇴사시키고, 그 자리에 지원하여 다시 재입사했다는 것.

성별과 무관하게 오직 ‘능력’만으로 평가받았다는 식의 설명은 반쪽짜리였다.


육아로 인해 경력 단절 후 계약직을 전전하던 그녀에게 이 회사는 집에서 5분 거리의 안정적인 일터였고,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그녀의 손으로 트러블 많던 남자 팀장을 내보낸 후, 그 자리를 스스로 꽤 찰 수 있는 ‘좋은 직장’이었다.

정규직으로 승진을 기다렸다면 10년이나 걸렸을 팀장 자리를 단숨에 뛰어오른 그녀에게 이 회사는, 아마도 최고의 직장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끝없는 회사 칭찬에 나는 점점 불편해졌고, 결국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팀장님은… 대표님이 수시로 터치 안 하세요?”

놀란 그녀는 인터뷰를 진행하던 연구원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혀요. 저는 낮은 직급으로 대면을 해서 그런지… 오히려 엄청 거리를 두시던데요…”

그 말에, 지난 내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그 모든 걸 덮으려는 듯, 마치 대표와 한편이라도 먹은 듯 내게 이런 말을 던졌다.

“팀장님이 너무 매력적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미친”

나는 어이없는 그녀의 대꾸에 가슴이 터질 듯 조여왔다.

지난 2월, 야외 행사에 출근한 내 가슴 앞 패딩 주머니에 대표가 갑자기 손을 집어 넣으며 “추운데 왜 열고 왔냐?”며 갑작스러운 행동을 할 때, 그녀는 바로 옆에서 함께 웃고 있었다.

모든 걸 보았던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이제 와서는 그 이유를 ‘내 매력’ 때문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 뻔뻔한 얼굴을... 정말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며칠간 숨이 막혀 잠을 자지도, 운전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결국 지난 3년간 대표에게 성추행을 당할 때마다 기록해 두었던 메모장을 꺼내 읽었다.

20건이나 넘는 추행을 견디고, 함께 분노하는 팀원들에게 애써 웃음을 띠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 모시고 주간보호센터 갔더니 거기 요양보호사들이 어르신들 손을 잡아주더라고...

나도 요양보호사로 취직했다... 생각하면 되지 뭐”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그동안 당했던 일들을 정당화하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못 참아, 이걸 들고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성폭력 상담이 가능한 모든 곳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건조하고 매뉴얼처럼 반복되는 말들뿐이었다.

“일단 스피커폰 끄시고, 차분하게 말씀해 주세요. 목소리가 잘 안 들리면 상담이 어렵습니다.”

“회사에서는 직장 내 성폭력 예방 교육 안 하세요? 중간관리자가 돼서 이런 걸 그냥 두셨어요?”

“저희는 접수가 되어야 제대로 된 의견을 드릴 수 있고, 사건 처리 이후에 대한 상담은 어렵습니다.”

어느 곳 하나, 내 상황을 진심으로 들어주거나 조심스럽게 조언해 주는 곳은 없었다.

‘네, 네’라는 기계적인 대답 속에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신고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신고 후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그 이후의 상황들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나의 물음에 속시원히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회사와 집, 마주치는 가족과 동료들 사이에서 내 정신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