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같은 공연장에서 몇 차례 함께 일했던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새 우리는 서로에게 끌려 공연장에서 보냈던 긴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의 시름을 달랬다. 때로는 어리숙했던 내 과거 이야기에 목청껏 웃어 주던 그런 친구였다.
하지만 우리는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어느 쪽도 먼저 밥이나 영화를 보자고 청하지 않았고, 그때의 우리는 밥 한 끼 함께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매일 밤 늦게 끝나는 힘든 일을 마치고, 말없이 퇴근길을 함께 걸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색한 키스가 스며들었지만, 그건 그저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공연장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리에도, 내 마음에도 겨울처럼 쓸쓸함이 찾아왔다. 그는 4년제 편입을 준비하던 시절이었고, 나는 입학서류를 도우며 다시 예전 친구로 돌아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소개팅 후 부모들의 성화에 떠밀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그와의 연락을 끊게 되었다. 애매한 이성 관계가 결혼을 전제로 한 내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까지 겪고 난 몇 년 후만에 내 휴대폰 화면에 익숙한 번호가 나타났다.
“여보세요?”
“잘 지내?”
마치 어제 헤어진 친구에게 전화하는 듯, 그는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몇 달 뒤, 내가 사는 고향으로 투어 공연을 하러 온 그 친구는 지난 시간이 무색할 만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편입에 합격 후 졸업하면 내게 고백할 마음이 있었지만, 얼마 후 들려온 내 결혼 소식에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그러다 예기치 않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한동안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지냈다고 했다.
그 짧은 재회 이후에 우리는 거의 지난 3년 동안 몇 달에 한 번씩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끔은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20년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누다 보니, 서로의 발길과 추억이 참 많이 겹쳤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졸업 후 떠나온 캠퍼스 근처에서 그는 자취를 시작했고, 나는 그가 가족들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던 건물의 한 산부인과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각자는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자녀가 있음에도 이혼을 결정해야 했던 것까지 닮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신이 우리 인연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년의 시간 동안 서로 안부를 전하며, 우리는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미묘한 설렘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혼 후 각자의 어려움과 사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우리는, 어느 쪽도 쉽게 다가서지 않는다.
예전의 우리는 너무 젊어서 어설펐고, 지금의 우리는 짊어진 짐이 너무 많아 발을 떼기가 두려운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다시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