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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라는 인생의 함정

by 누구니

숨이 턱끝까지 찰 만큼 뛰었는데도 결국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지 못했다.

눈 앞에서 유유히 떠나가는 기차를 보며 망연자실한 나를 향해 수신호하던 승무원이 차갑게 말했다.

"표 반환하시고 다시 표 끈으셔야 합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저기 가방 열렸어요!"

"안에 있는 거 다 떨어지겠어요.."라며 소심한듯 조언을 해왔다.


맞다...이건 나에게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아직 회의까지는 5시간이나 남았고 다음 기차는 20분이면 도착한다. 몇 천원의 환불수수료를 부담하면 해결 가능한 일이다. 다음 기차표를 예약하고 나니 아까부터 내뺨을 스쳤던 아침 바람이 그제서야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까 나에게 소심한 조언을 해줬던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한 것도 약간의 후회로 밀려왔다.

이 짧은 찰나, 나는 깨닫는다.

나는 어쩌면 매일 이런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회사 일이든, 집 안일이든, 앞에 이 일이 되지않으면 지구가 끝날 것처럼 매사에 '최선'을 다해 정신 없이 뛰다가...예상치 못한 좌절에 세상을 잃은 것처럼 망연자실하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향해 하는 조언도 무시한 채...그냥 앞만보고 달려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왜 여기있지? 라는 생각으로 급격한 우울감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지난 한달 가량 연인과 친구 사이를 고민하던 옛인연과 깊은 통화를 나눴다.

그는15년간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약기운 때문인지 하루에 수면시간은 4시간도 채 되지 않은 채 새벽 6시면 출근해서 12시가 되서야 귀가를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 전 자신의 눈앞에서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연인인지.. 아무리 일을 해도 맺궈지지않는 재산분할인지...아니면 일주일씩 번갈아가면서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딸인지...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그의 시야가 짧은 건 분명하다. 넓고 길게 보기보다는 당장 자신의 앞에 나 있는 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다가...매일 밤 한 알의 약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는 듯...

더이상 코너로 몰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로 닮은 듯, 또 매우 다른 그와의 대화는 할수록 각자가 숨겨왔던 삶의 비밀을 하나씩 꺼내게 했다.
여전히 애매한 친구로 남아 있지만, 그는 때로는 지난 날을 향한 냉정한 평가로, 또 때로는 따뜻한 이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조언을 건넸다.
나또한 과거의 아픔으로 약에 매달려 매일을 '최선'에 갇혀 사는 그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인연이 과연 그저 ‘저기, 가방 열렸어요’라고 알려주던 스쳐 간 행인처럼 끝나버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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