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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p 08. 2015

남편의 자유로운 안식년과 아내의 조건없는 솔로여행

함께 멀리 가려면...

동네 언니처럼 지내는 같은 회사 부장님과의 커피 타임.


지인 중 한 분이 삼십여 년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으셨단다. 1년을  오롯이 쉬면서 머리도 비우고, 인생 제 2막을 구상할 계획이셨다 한다.

친구도 만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니고, 운동도 좀 하고, 책도 보고, 그렇게 하릴없이 여유 있는 하루하루를 꿈같이 보내며 지내셨다고.   삼시 세 끼를 와이프한테 해달라고 했다던가,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뒹굴했다던가 하는 구체적인 정황은 듣지 못했다. (뭐 일주일 중 며칠은 그렇게도 하셨으리라 감히 짐작은 해본다)

하지만, 본인 생각과는 다르게 꿈같은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단다.  예고도 없이 와이프의 서슬 퍼런 백기 선언이 있었고, 더 이상 집에서 빈둥대는 꼴은 못 봐주겠다는 잔소리가 시작되더란다.

영원히 기약 없는 백수로 전락한 것도 아니고, 일 년만 쉬면서 구상을 하겠다는데, 이건 뭐지?

순간적인 짜증은 화를 거쳐 급기야는 분노로 표출이 되고 말았단다.


"내가 가족을 위해 30년을 앞만 보고 부서져라 일만 했는데, 고작 1년을 못 봐주니?
 삼십 년 동안 나는 뭐였던가?  흔히들 말하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였나?"


(비약적이긴 하지만) 본인 인생이 가여워서 살짝 울컥 까지 하셨단다.

생각이 거기 까지 미치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돌아볼 새도 없이 짐을 꾸려 집을 나왔단다.  

"나 앞으로 남은 육 개월은 여행 다니면서 생각할 거야.  연락 안될 수도 있어.  행선지 옮길 때마다 전화할게"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정말 행선지를 옮길 때마다 위치정보 확인 쯤의 간단한 메시지만을 던져 준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 삼십 년을 일했는데, 1년은 봐주시지(이건 내 생각이다)

아무 계획도 없이 1년을 마냥 놀겠다면 거품 물 일이지만, 삼십 년 일하고 일 년을 여유롭게 쉬겠다고 한다면 봐줘야지.  가끔 보기 불편해도 1년 정도는 보듬어 봐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부장님, 그 아내 분 좀 너무 하셨네요.  1년만 눈감아 주지.. 근데 부장님, 거꾸로 만약에 육아와 직장을 기십연간 병행한 와이프가 '그동안, 엄마, 아내 외에 나는 없었던 것 같아.  너무 지쳤어.  나만의 시간이 좀  필요한데... 나 한 달만 혼자 여행 좀 하고 싶은데... 괜찮지? '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

"어?  한 달? 혼자?"  

"네, 국내든 국외든 한 달요. "

"음.... "


명쾌하게 답을 못하신다.  


"저희 남편도 아마 죽어도 안된다고 할 듯해요.  근데 왜 안 되는 거예요? "

"글쎄.... 여자 혼자면 위험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혼자 해결하기 힘든 부분도 많고... 결국은 위험요소가 너무 많아. "

"음.... 근데요, 딸이라면 지금 부장님 말이 좀 이해될 것 같은데, 애 낳고 직장 생활까지 할 만큼 한 성인 여자라면 웬만한 어려움쯤이야 혼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완전 스마트한 세상이잖아요. 그건 이유가 안돼요.   혹시 혼자 여행 가서 소위 말하는 "썸" 탈까 봐 그러세요?"


(얼굴 빨개지시며 웃는다)  아무튼 혼자 한 달은 너무 기단다.


"근데요, 부장님!  그런 걱정이시라면 이박삼일, 일주일도 마찬가지예요.  "썸" 은 그 시간으로도 충분히 탑니다.  그러지 말고 언니가 보내 달라고 하면, 그냥 쿨하게 보내 주세요.  다녀오면 더 잘 하실 거예요. "


이렇게 마무리는 했지만, No의 이유는 인정하기 싫지만 흔히들 말하는 콧바람 들까 봐 그러는 게 맞는 듯했다.

'아, 이런 건 남자들의 표상 같은 수컷 본능인가?'

여자들의 순수한 힐링 의도를 매도하는 건지 아님 그냥 여자 혼자 여행 가는 자체가 싫은 건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혼자 보고 느끼고 정리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부인이나 엄마로서의 역할은 완벽하게 배제한 채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에 대해 어떻게 밸런스를 맞춰야 할지, 미래에 대한 혜안의 에너지를 얻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시간이 있어봐야 곁에 있던 사람이 더 그리운 법이다.


나무도 어느 정도 공간을 두고 심는 게 이치다.  너무 다닥다닥 붙여서 심으면 서로의 그늘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한다.  좀 떨어진 채 서있어야 바람도 잘 통하고, 볕도 잘 들어서 더 진하게 높이 클 수 있는 거다.


삼십 년 일한 남편의 안식 1년은 제 멋대로 하게 해주는 게 마땅하고, 나를 찾겠다는 아내의 한 달 여행도 쿨하게 보내주고 볼 일이다.  함께 멀리 가려면 응당 그래야 한다.


서로의 시간을 인정할 것,

각자의 기호를 인정할 것,

상대의 타인을 인정할 것,

진정한 관계의 기본이다.



 ㅣ iris

사진 ㅣ iris,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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