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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SF소설 [파견자들] 태린과 이제프의 관계성

by 시안
나는 너의 일부가 될 거야. 어떤 기억은 뇌가 아니라 몸에 새겨질 거야.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 사랑해. 그리고 이제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 p12-13 [파견자들]



KakaoTalk_20250327_111848079.jpg 김초엽 작가_출처 경향신문

처음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된 건 [파견자들]이다. 밀리의 서재에서 오디오 북으로 들었고, 옆에 두고 읽고 싶어 질 때마다 계속 읽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도 그랬다. 뭐든 책으로 먼저 읽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밀리의 서재 오디오 북의 성우진이 너무 매력적이라 오디오북으로도 꼭 추천드린다. 자연스럽게 작가가 누군지 관심이 갔고 포항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을 학사를 받은 젊은 작가였다. 어떻게 이공계 엘리트가 문과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지 놀랍고, '김초엽은 내가 과제하는 속도보다 책을 빨리 쓴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만큼 작품 활동을 정말 부지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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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_출처 유튜브 지그재그 인터뷰

이 독특한 이력의 작가를 유튜브 지그재그 인터뷰영상에서도 보게 되었는데, 너무 귀엽고 예쁜 분이었다. 그는 SF작품에서 여성인물들이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주인공을 서포트하거나 협력하는 존재로만 등장하다 보니까 미묘한 소외감 같은 걸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여성들이 주요 인물들로 등장하고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도 다뤄진다. 또 김초엽 작가는 또래 여성들한테 갖고 있는 특별한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가 글을 쓸 때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독자들이 되어준다고.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세대를 지내오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읽는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 솔직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고. 그의 글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또래 여성들이 있기에 그가 맘 편히 솔직한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인 것 같다.




파견자들.jpg 책 [파견자들]

※ [파견자들] 스포일러 있어요.

다시 [파견자들]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특히 태린과 이제프의 관계성을 사랑한다. 태린과 이제프의 마음을 망상해봤다.


태린

어린 시절 실험실에서 이제프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제프는 부원장님으로 소개되었다. 나는 머지않아 우리가 실험대상이고 이제프를 포함한 어른들이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이제프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내 친구이자 내 그 자체이기도 한 쏠이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이제프로 부터 지상에 대해 알기 시작했고,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이제프는 나의 호기심을 기특해했고, 쏠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줬다.


이제프

나에게 연구소는 그저 떠맡은 일이었다. 연구소의 실험대상으로 불리는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관심이 없었다. 범람체에 감염되었지만 살아있는 아이들을 연구한다? 아이들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비윤리? 애초에 아이들은 범람체에 감염되었다. 범람체다. 어차피 이 땅에서 범람체는 제거해야 한다. 아이들이라고 해도 인간이 범람체에 감염될 수는 없지 않은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언제나 냉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 오판이었나. 태린이라는 아이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반짝이는 눈으로 이것저것 물어오는 똑똑한 아이. 자신들이 실험대상인 것을 알아차려버린 잔망스러운 아이. 이 아이의 천진함이 언젠가부터 마음 쓰리다. 태린을 아끼게 될수록 이제 정말 방법을 찾고 싶다. 범람체로부터 태린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 이 똑똑한 아이에게 미래를 주고 싶다... 실험이 실패했다. 아이들은 죽었고 태린은 기억을 잃었다. 자기 안에 범람체인 쏠을 없애지 말라고 울부짖던 태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죄를 조금이나마 씻기 위해서라도 이 아이를 평생 지켜줘야 한다. 나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태린을 지켜줘야 한다.


태린

지상이 범람체에게 잠식되어 버린 세계. 나는 선우, 자스완 아저씨와 지하도시 라부바와의 하라판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형편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나에게는 파견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다. 파견자가 되어 범람체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프 옆에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그의 동료로서 설 것이다. 파견자 시험을 앞두고 이제프가 계속 내 면회를 거절한다. 이제 내가 귀찮아 진건가.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 등장만으로 모두의 주목을 끄는 명성이 높은 그가, 파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응시생 중에 한 명인 나를 특별히 신경 써줘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나를 편애하는 게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살짝 놀리듯 말하는 그 모습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나에게 이제프는 선오와 자스완 아저씨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다. 아니 그와는 조금 다른 곳에 크게 자리 잡은 사람이다. 이제프에게도 내가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어도 되는 걸까.


이제프

태린이 나를 좋아한다. 하긴 태린은 늘 나를 좋아했지만. 태린은 어릴 때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런 태린의 마음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나는 태린 자신보다 먼저 알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 마음이 커져서 언젠가 그 애가 상처받을 까봐 걱정이 되긴 했다. 나도 나의 방식대로 태린을 사랑한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지켜봤던 아이에게 장성했다 한들 어떻게 잠시라도 연애감정 비슷한 걸 느낄 수 있겠는가. 그저 태린은 태린이고, 범람체에 잠식당해 버린 이 희망 없는 세계에서 내가 희망을 찾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이다.




파견자는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직업입니다. 무언가를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야 합니다. 그걸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파견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p41-42 [파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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