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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은 죽음으로만 인정되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작가를 기리며

by 시안
세바시.jpg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저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 백세희 작가가 지난 10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놀랐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책을 읽었고, 또래 여성이고, 나도 우울증을 겪었기에.. 생전 그녀가 세바시 강연에 출연했을 때, 기억에 남는 질문이 출간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돈도 많이 버셨을 텐데 그럼 우울증이 좀 나으셨나는 질문이었다고. 그녀는 질문자께서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를 했는데, 로또에 당첨됐어요. 그러면 부러졌던 다리가 바로 붙나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귀여운 외모와 상반되는 쎈 캐릭터가 재밌다.) 우울증이라는 게 그렇게 심플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이 우울증의 한 가지 이유가 될 순 있지만, 우울증은 결코 딱 한 가지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솔직히 나조차 어쩐지 그녀의 성공과 함께 그녀가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얼마나 편견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런 시선들에 그녀가 더 힘들지는 않았을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데 밝게 웃으면 우울한 거 맞냐고 하지 않았을까. 우울증으로 장사하냐고 하는 사람은 없었을까. 누군가의 성공을 쉽게 생각하고,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세상이 더 날이 섰다고 느끼진 않았을지. 그녀는 떠났고,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좋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힘든 일은 지나갈 거야, 좋은 날이 올 거야. 이렇게. 근데 사실 앞날에 더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고, 흔히 하는 말인 꽃길만 걸으라는 말도 그 예쁜 마음이야 잘 알지만, 그 누구라도 꽃길만 걸을 수는 없는 걸 안다. 그래서 때로 내가 아무리 죽을 듯이 힘들어도, 주위에서 괜찮아질 거야.라고 하면, 그 믿음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세상에 옅어지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인정해 주길 바라기도 한다.



때로 우울증을 겪는 사람의 성공, 빛나는 외모와 같은 배경이 그 사람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너는 좋은 환경을 타고났잖아, 죽도록 힘든 일을 겪은 건 아니잖아. 내가 더 힘들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약해서 그런다. 마치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런데 죽도록 욕하다가 누군가 스스로 생을 달리하면 그때부터는 모두가 면죄부를 주고, 그의 고통을 갑자기 인정한다. 살아서 고통받는 사람한테는 너무 가혹하고, 죽음을 택하면 갑자기 너그러워진다. 죽어야지만 그 고통이 정말 무겁고 실재했다는 게 받아들여지는 건가 싶기도 했다.



누군가 내 슬픔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 내 고통을 축소해서 생각하는 건 다르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거죽을 쓰고 그 사람으로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그래서 항상 나도 내가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 앞에 겸허하려고 노력한다.



좋은 것만 반기고 어두운 것은 빨리 지나가기를 재촉하는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은 힘들어하면서 살아도 괜찮다. 괜찮아 지지 못하고 쭉 힘들어 하며 살아도 된다. 죽음 이라는 선택지를 왜 택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답은 없지만, 어쩌면 미래의 어느순간 살만해진 자신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도 이런 말하기 싫었는데 살아온바 요즘 우울함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기대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물론 다시 진창으로 처박힐 날이 아마 올 거다. 그럼에도 내가 과거에 영원히 괜찮아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죽음으로써라도 고통을 증명하고 싶었던 내게 알려주고 싶은 현재다. 꾸역꾸역 살아줬음에 고맙고, 너의 고통이 깊고 실재했음을 인정한다고.





화면 캡처 2025-01-01 180041.jpg

백세희 작가의 빛나는 재능과 용기를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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