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호기심 대마왕'이었다. 뭐가 그리 궁금하고 신기한 게 많은지, 직접 만져보고, 먹어보고, 경험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참지를 못했다. 그런 나를 돌아가신 친할머니는 종종 '오살 놈'이라고 부르곤 하셨다(뜻만 따지면 무서운 말이지만 전라도 지방에서 흔히 쓰이는 가벼운 욕이다). 간혹 세상에서 제일 예쁜 '똥강아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살 놈'이란 말을 더 많이 들었더랬다. 뜬금없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종 신고'를 몇 번이나 경험할까? 아마 대개는 거의 없올 그런 실종 신고를 나는 셀 수도 없이 경험했다. 나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할머니는 장이나 일을 보러 가실 땐 나를 집에 두고 가셨다. 어린 손자를 혼자 두고 가는 게 매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 데리고 나갔다 하면 실종(?)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귀여운 바둑이 쫓아가랴, 고추잠자리 잡으러 가랴, 어디선가 구수한 옥수수 찌는 냄새라도 나면 나는 백발백중 할머니 눈 밖에서 사라져 버렸다. 결국 할머니는 극단의 조치로 나를 집에 두고 다니기 시작하셨고 할머니가 오실 때까지 집을 잘 보고 있으면 '부라보콘'이라는 달콤한 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라보콘은 나의 본능을 억누르지 못했다. '호기심 대마왕'인 나는 수없이 바깥세상을 탐험했고 할머니는 동네 파출소에서 신고의 일인자가 되셔야만 했다. 경찰 아저씨 손을 잡고 귀가하는 나에게 등짝 스매싱과 함께 날아오는 할머니의 한 마디,
이놈의 오살 놈, 염병하고 자빠졌네! - 욕쟁이 우리 할머니
호기심 대마왕의 현재
어느덧 호기심 대마왕은 자라서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현재 나는 영업팀장으로서 10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정말 일만 바라보며 살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었다. 막상 지나고 보니 시간의 그렇게 흘러버렸다. 덕업 일치, 워라벨, 욜로 등을 외치는 세상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지인들은 워커 홀릭이라며 안쓰러워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지인들만의 의견은 아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나의 삶은 과연 즐거운가?' 답은 반반이라고 할 수 있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처음 도전하는 분야였지만,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그들과 한 팀이 되어 일하는 것 또한 즐겁다. 그 안에 내 꿈도 있고 사명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돈도 벌어야 하지만 제 생각에 직업이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즉 말 그대로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지 하는 정체성에 가깝다고 봅니다. - <잡스 에디터>, 19p
에디터에게 배우는 일과 삶
'에디터'란 쉽게 얘기하면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이어 붙이고 적절하게 배치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다. 얼핏 에디터란 직업과 나랑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이 일을 대하는 자세와 가치관, 실패의 경험 등을 읽어가면서 나의 삶을 좀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힌트들을 배우게 되었다.
호기심은 에디터의 필수 자질이에요. 호기심이 없으면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없으니까요. - <잡스 에디터>, 62p
이 문구가 참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것을 하려면 우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과거에 겪었던 오류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것은 단지 기다린다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끊임없이 찾고 경험해야 한다. 그건 본인의 의지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다.
많이 공부하고, 사방팔방으로 손을 뻗어 '잡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잡스 에디터>, 255p
호기심 대마왕의 미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의 모습
(2007년 남인도 고아에서...)
나는 여전히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새로운 것과 설렘이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것만 할 수는 없다. 다만 지난 시간들이 '당위적 자아'로써 살아온 날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조금씩 '이상적 자아'로써의 나로 살아가고 싶다. 일과 삶과의 균형, 그리고 그 속에서 언제나 나를 잃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할머니의 찰진 욕을 들을 수 없지만 할머니 속을 새까맣게 태운 오살 놈이었던 나는,앞으로도 쭉 호기심을 쫓는 '오(娛 : 즐길 오)살 놈'으로 살고 싶다.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에게는 지루할 틈이 없거든요. - <잡스 에디터>, 2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