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오로지 드는 생각은 "그만 달릴까?", "이 정도가 한계 같은데?"와 같은 포기의 유혹뿐이다. 17K 지점 돌파 후 나의 몸과 정신이 급격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음악을 바꿔서 재생한다. 현타가 올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한 나만의 '파워송'이다. 비장한 배경음과 함께 들려오는 가사가 나를 슈퍼맨으로 만들어준다. 몸에 다시 힘이 솟는다. 도로와 공기, 주변의 풍경이 나와 한 몸이 된 듯하다. 물아일체의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이때부터는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해 한 발짝씩 내딛는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 "축하합니다! 목표를 달성하셨습니다!!!" 드디어 내 생애 첫 21K 달리기(하프마라톤)를 완주했다!!!
우리는 음악을 근육으로 듣는다
신중하게 통제된 여러 실험에서 사운드트랙을 첨가하자 조정, 달리기, 수영 선수들이 기록을 몇 초씩 단축하는 결과가 나왔다...(중략)... 게다가 음악에 맞춰 움직이면 전력을 기울일 때도 산소를 덜 소모한다. 음악 자체가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 같다. - <움직임의 힘>, 139p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은 음악이 운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언급한다. 특히 노래의 온갖 특징 중에서 우리를 더 힘차게 밀어붙이면서 피로와 통증과 인지된 노력까지 줄여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가사'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즐겨 듣는 운동용 재생 목록을 살펴보면, 인내심과 투지를 강조하는 가사의 노래가 굉장히 많았던 것이다. 나 역시 평소에 달릴 때 비트가 강하고 신나는 음악을 주로 듣는다. 그리고 기록을 단축시키거나 높은 목표량을 설정한 날은 항상 나만의 피니쉬곡 몇 개를 선정해 두는데, 모두 한국 노래로 구성되어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인 나에게 한글 가사가 더 쏙쏙 잘 들리기 때문이다(21K를 뛰었던 날에 들었던 곡은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OST인 '시작 '과 '돌덩이'였다).
음악학자들은 음악에 근육의 힘과 크기와 능력을 높여주는 '에르고제닉'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 <움직임의 힘>, 137p
함께 하는 것의 힘
21K를 뛰던 당시에는 음악이 나에게 큰 힘을 주었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달리기를 해 올 수 있도록 힘을 준 것은 따로 있다. 2년 전 공황장애와 만성 우울증 치료의 일환으로 시작한 달리기였다. 솔직히 말해 그때만 해도 달리기가 현재 나의 핵심 루틴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5분 뛰는 것도 버거웠던 그때, 일주일에 3번 정도 뛸 수 있도록 습관을 만드는 데만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시기적절하게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인 '66 챌린지(온라인)'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때 매일 달리는 습관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그다음은 '소파에서 5km까지' 모임이었다. 한 번의 오프라인 만남이었지만 함께 하는 힘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해 준 계기였다. 그때의 계기를 통해 '체인지 러너스(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의 단톡 방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
비록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오프라인 훈련은 많이 참석할 수 없었지만 체인지 러너스 단톡 방에서 진행된 많은 분들의 조언과 응원은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21K 달리기도 한 분 한 분의 조언대로 준비를 했고, 많은 분들의 응원은 내가 완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날 나는 혼자서 뛰었지만 결국 함께 뛰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긍정적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당신은 그 기대에 부응하려 애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으로 거듭나도록 허락받는 것과 같다. - <움직임의 힘>, 107p
움직여라! 삶이 바뀐다!
2년 간의 달리기는 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첫 번째 선물은 단연 육체적 건강이다. 현재는 그저 뛰기만 하던 것을 넘어 기록 경신이라는 새로운 도전들을 해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인바디 측정표만 보더라도 과거보다 얼마나 건강이 좋아졌는지를 스스로 실감할 수 있는 정도다. 몸이 많이 아프면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라는 진부한 얘기를 가슴 깊이 새겨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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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선물은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의 회복이었다. 달리기의 장점 중 하나가 기록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꾸준히 누적된 기록들을 보면 뿌듯함은 물론이거니와 기록만큼이나 건강도 차츰 나이 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좋아진 몸상태와 컨디션은 새로운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만들어줬고, 앞으로 어떻게 나의 삶을 의미 있고 값지게 살 수 있는지 방향 설정을 하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우울증이 완쾌된 것도 아니고 아직은 직업의 일선에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2년 전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움직여라! 삶이 바뀐다!
날 수 없다면 뛰어라. 뛸 수 없다면 걸어라. 걸을 수 없다면 기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 <움직임의 힘>, 14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