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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 the 하트히터 May 28. 2020

결말이 나지 않는 충돌

feat. 태초에 느낌이 있었다

아윌비백( I'll be back)


▲ 컴백의 대명사 -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


영화 <나 홀로 집에>의 '맥컬리 컬킨'만큼이나 브라운관 세대들에게 익숙한 배우가 있다. 급기야 그는 매번 다시 돌아오겠다(I'll be back)는 선언(?)을 유행어로 만들기까지 했다. 바로 영화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형이다. 이 형은 아마도 돌아가실 때까지 위 사진처럼 터미네이터로서 계속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뜬금없이 터미네이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영화에 나오는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I'll be back

- <터미네이터>, T800 대사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의 시작?


▲비록 한 번이지만 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사람 - 이세돌


이세돌과 현대판 스카이넷인 알파고와의 대결이 있던 게 벌써 2016년이다. 당시 전문가들과 언론,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이슈였다. 그리고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훨씬 더 발전한 인공지능 기술들이 선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단순히 인간 삶의 편리함만을 뜻하지 않는다. 쉬운 예로 인공지능과 기술의 발달함에 따라 자율주행 자동차의 상용화가 앞당겨지고 있고, 날씨를 예측하고 중장비를 작동시키는 등 그동안 인간들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른바 인간과 인공지능(기계)의 일자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18세기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


이러한 예는 일찍이 18세기 영국에서 있었다. 바로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이다. 1811~1817년 영국의 중부 ·북부의 직물공업지대에서 일어났던 기계 파괴 운동으로, 당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직물공업에도 기계가 보급되어 가는 한편,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경제 불황에 빠져 고용감소와 실업자가 증가하고 임금의 체불 등이 성행하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물가는 나날이 올라 이로 인하여 노동자들은 실업과 생활고의 원인을 기계의 탓으로 돌리고 기계 파괴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양상이 비슷해서인지 현대판 버전으로 러다이트 운동이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충돌의 중심에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충돌의 배경이 된 태초의 시작이다.






태초에 느낌이 있었다


▲ 쉽지 않은 책이다


<느낌의 진화>는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주장을 진화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생명의 탄생 시기부터 인간의 문영에 이르기까지 긴 진화적 과정 동안 감정이 생명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대부분 단세포생물에서 다세포생물로 진화하면서 복잡한 사회적 행동을 습득해 나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능이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한 후에 문화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 중심 사고는 생물학적인 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느낌'이다. 느낌은 인간이 질문을 던지고 대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즉 창조적 지성이라고 여겨지는 정신 활동의 촉매제로서 지성 이전에 존재해 왔다.

그리고 느낌과 함께 주목해야 하는 개념이 바로 ‘항상성’이다. 여기서 항상성은 균형과 안정과 같은 '중립적 상태'가 아니다. '좀 더 편안하고 좋은 상태를 향해 스스로를 상향 조절하는 생명의 작용'이다. 항상성은 고등 생물뿐만 아니라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동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항상성은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개체 수준으로나 종 수준으로나 생명이 후대에 이어지고 번성하도록 해주는 생명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결론은 머나 먼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인간의 문화를 지속하는 것은 느낌과 항상성이라는 것이 다마지오의 주장이다.


태초에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

- 373p





결말이 나지 않는 충돌


▲ 기계는 우리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태초의 시작은 항상성과 느낌이었고, 자연 발생적이든 의도를 했든 지금까지 인간의 문화를 지속시켜 온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생명 조절 법칙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받은 카드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한다. 문화와 문명은 이런 노력의 결과가 축적된 것에 대해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결국 충돌의 해결을 위한 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인문학 노래를 부르며 인문학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과 인간사이의 충돌에 대한 쟁점은 쉽사리 결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인간이 인공지능에 지배 당하는 날이 올지 안 올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예단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아놀드형은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총을 든 모습이 아니라 빗자루와 앞치마를 두른 인간의 동반자로서 착한 형의 모습이기를 희망해 본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의 대사





* 참고 : <느낌의 진화>, 안토니오 다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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