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 그동안 배워보고 싶었던 여러 언어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성조에 따라 뜻이 달라져버리는 중국어도 재밌었지만 스페인어를 처음 배울 때 단어와 관사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표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머리를 한 대 세차게 맞은 것 같았다. 존재한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신대륙에 어엿한 문명을 이룬 국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개척자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domingo(일요일), libro(책)과 같이 o로 끝나는 것은 남성 명사, casa(집), rosa(장미)처럼 a로 끝나는 것은 여성명사. el, un은 남성 관사, la, una는 여성관사, 이런 것들이 존재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한 동안은 모든 단어를 성으로 구별하는 놀이에 빠졌다. 고등학생 때 '엘 셰노르'란 만화를 즐겨보았다. 책 제목을 엘세뇨르로 붙여 발음했었는데 엘과 세뇨르 사이에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을 누렸다.
신조어가 생길 때면 한글같은 표음문자가 아니라 글자들을 새로이 조합해야 하는 중국어나 성관사를 붙여야 하는 라틴어 계열의 언어를 쓰는 나라들에 관심이 간다. 이번 코로나 19라는 단어에 어떤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했다. covid-19의 코로나는 크라운(crown)의 라틴어라고 한다. 왕관을 뜻하는 corona에서 왔다고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La corona -19' 여성명사로, 스페인은 'El covid' 남성 관사를 붙였다. 중성 관사가 존재하는 독일은 'Das corona virus'라는 중성 명사로 중국은 왕관(冠) 형태(状)의 병독(病毒)을 조합하여 冠状病毒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법적 성은 자연적 성인 여자, 남자와 전혀 관련이 없이 단어를 문법적으로 분류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많은 이가 희생된 바이러스에 여성명사가 붙는 것을 꺼려하여 프랑스에서는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때때로 달을 뜻하는 luna는 여성명사, 해를 뜻하는 sol은 남성 명사라는 것은 당연시하면서도 가난 같은 부정적 단어가 여성명사라 하면 사기, 벌 같은 명사가 남성 명사임을 알았을 때와 다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별적 사고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언어의 차이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모든 언어엔 규칙만큼 다양한 예외가 있다는 것이 내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젊었던 그때에 언어의 대문을 열고 더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창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모어로 지어진 집 한쪽에 큰 대문이 아니라도 좋다. 작은 창문을 여러 개 내고 싶다. 조금씩 들어오는 낯선 바람에 머리를 식히고 이국적인 단어를 따라 발음해보고 싶다. 낯설게 발음되는 이국적인 태풍 이름이 귀에 들리면 검색창을 열고 싶다.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을 들으며 r발음에 마음을 설레게 두고 싶다. 비록 번역되었을지라도 그림 같은 아랍문자로 쓰였을 책들을 읽고 싶다. 그렇게 낯선 세계를 유랑한다면 자유와 기쁨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라도 인생을 지루하지 않게 가꾸어 갈 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