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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21. 2021

무상 (無常)의 동의어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볼 때, 친구의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누군가의 부고 소식이 전보다 자주 들려올 때 '무상(無常)'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이런 때 떠오르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이 단어는 참 쓸쓸하다. 모든 늙음과 병과 죽음은 천천히 걸어오는 게 아니라 언제가 갑자기 다가와 코 앞에 서 있곤 했다. 아무리 예고된 것이었다 해도 항상 그런 느낌이었다.


 차분한 말투와 행동, 깊고 조용한 눈매, 그녀는 처음부터 언니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같은 과 한 해 후배로 새내기 때부터 보아 온 오랜 지인이다. 연애, 결혼, 출산과 육아 등 모든 것이 나보다 먼저였던 그녀는 사실 인생 선배나 마찬가지다. 입덧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것도 아이의 건강 상태나 출산 후 산모의 심리상태 등을 세심하게 물어봐주어 한다는 것도 모두 그녀에게 배웠다. 나는 누구나 다 겪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을 직접 겪고 나서야 그 모든 일들이 대수로운 일이었음을 알았다. 그 순간 누군가의 고단함을 알아주고 안부를 묻는 그 말 한마디들이 얼마나 힘이 되는 줄 몰랐다. 그녀 덕분에 '알았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 텐데, 다음엔 그녀처럼 해야지' 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이란 인생의 시련도 그녀를 먼저 방문했다. 결혼 생활 내도록 가족들이 외면하는 시아버지의 투정을 받아내느라 고생이 심했다. 한 번씩 털어놓는 덤덤한 하소연을 듣고 있자면 오히려 내쪽에서 열불이 났다. 그런 시아버지가 몇 년 전 큰 수술 후 기력이 많이 쇠하셨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간호한 사람은 며느리인 그녀였다. 그분이 얼마 전 급성 치매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계신다. 이 생의 정을 남김없이 떼고 가겠다는 생각이신 걸까, 성격도 병세도 점차 급격히 악화되어 손을 쓰기 힘든 상태라고 한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순간들을 견뎌내고 있을까. 질어지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그녀를 더욱 안타깝고 애처롭게 했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한참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 모든 게 어서 끝나서 그녀가 편안해졌으면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런 순간 '무상'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이던지.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죄책감을 불러오는 일이었던가. 입 밖으로 낼 수 없고 부정하고 싶은 나의 내면이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는 무책임한 위로가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애잔하고 쓸쓸해서 더 애틋해지는 음악 한 곡을 골라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답장은 또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했던지.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실감하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이제는 더 이상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도, 가족들과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많은 것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의 삶을 쓸쓸해하고 연민하고 있었다. 시아버지께 이 곡을 들려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며 차분히 들으며 기도하겠다고 했다. 이미 무상의 양면을 알고 묵묵히 견디고 있는 그녀가 거인같이 느껴졌다.


 예고하지 않은 소나기가 세차게도 퍼붓는 아침이다. 올여름은 유난히 아침 비가 잦다. 아마 8월 내도록 새벽에 깨어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리게 되는 것일까.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의 진리에 항상 깨어있으라는 세찬 가르침일까.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좋아서 한참을 듣는다. 고통의 순간도, 행복의 순간도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고통은 연민으로 애틋해지고 행복은 그 값을 두 배로 부풀린다. 창가에 놓아둔 물건들을 생각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데, 조만간 잦아질 텐데 싶어 한참을 그냥 둔다. 이 비도 다 지나가고 햇살이 비추리란 것을 알기에, 무더운 여름날 소낙비의 반가움을 알기에, 언젠가 작별을 해야 하기에. 더 경탄스럽고 사랑스러운 모든 존재, 지금 이 순간. '무상(無常)'과 '카르페 디엠'은 동의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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