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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22. 2021

편지



하얀 종이만 있으면 00에게로 시작되는 글을 적어야만 할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편지지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사실 편지지가 아닐 때가 더 많았다. 장소나 시간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수업 중 노트 필기를 하다가, 집으로 날아온 광고지 뒷면을 발견했을 때도 구겨지지 않은 선물 포장지를 뜯다가도 펜을 찾았다. 하얀 종이는 여백에 대한 의무같은 것이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가난했던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처럼 간절한 마음은 아니었다해도 나에 대해 말하고 네가 궁금하던 간절함이 있었다.


SNS가 없던 시절 소통의 도구는 편지였다. OO으로 시작되는 글이었지만 내 이야기만 늘어놓기도 했고 '선생님 수업이 지루하다', '마치고 떡볶이 먹으로 가자' 같이 사소한 문장들이기도 했다. 너한테만 말하는건데로 시작되는 친구의 뒷담화도 있었고 '사랑', '꿈' 같이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던 단어들에 대한 단상까지 참 많은 것이 여백을 채웠다. 주제도 구성도 필요가 없었다. 생각나는 것을 자유기술법에 의거 거리낌없이 적어나가던 은밀한 사귐의 글, 편지. 마음이 주제가 되었던 글, 편지.


일기는 메아리가 없었고 소설은 보답이 없었다. 여행기는 연재가 힘들었고 시는 넘사벽이었다. 다양한 형식의 글들에 홀렸지만 여전히 00에게로 시작되는 글은 질리지 않는다.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작품보다 '승희에게' 로 시작되는 사소하고 귀중한 이야기를 사랑한다. 'OO에게'가 '승희야, 이모야, 엄마, 우리딸'로 변주되어 돌아오는 것을 고마워한다. 나를 제일 많이 울리고 제일 많이 미소짓게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같이 추억을 불러오는 글. 장장 일곱 바닥에 걸쳐 쓰여진 '마들렌' 에서 비롯된 그의 상념들.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그리움의 정서. 정리되지 않아 날 것 같지만 끝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매혹적인 글. 그런 편지를 쓰고 싶다. 프루스트의 팬들이 들으면 기겁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유기술법에 의거 마음가는 대로 끄적이던 우리들의 편지가 그 위대한 작품과 어느 면에서 꽤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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