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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23. 2021

 '나', 그 알 수 없음에 감사하며

#'나', 그 알 수 없음에 대하여

참니 케이크/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으면 어떤 음식의 조리법과 재료가 달라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어떤 재료가 빠지고 조리 환경이 달라지더라도, 침니케이크를 헝가리의 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것은 헝가리인을 헝가리인이라고 말하고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없을까?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 걸까? 나를 나 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다정한 매일매일 p117 p118


본래의 재료가 빠지고 조리 환경이 달라졌음에도 참니 케이크를 헝가리의 빵이라 말해도 괜찮은 걸까? 백수린 작가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 걸까? 나를 나 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하며 나에게 대화를 걸어왔다. 항상 예민하게 달려들고픈 매혹적인 대화 주제다. 얼마 전에도 '뷰티 인사이드'를 인상 깊게 본 지인이 '한 달에 한 번씩 성별도 생김새도 나이도 심지어 목소리까지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면 나를 알아볼 수 있겠어'라는 물음에 나는 제법 난감했었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천착해 온 이 주제에 매번 귀가 솔깃하고 마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 같은 것일까. 여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내놓는 답도 매번 달라진다면 이 문제에 근본적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소개팅을 앞두고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이는 30살에, 키는 한 175cm 정도에 보통 체격이야. oo대학교 나와서 은행에서 일해. 취미는 낚시고 집안도 꽤 좋아. 장기 기증도 신청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는 거 보면 제법 생각도 바르고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이런 정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나 언제나 30살에 멈춰있지 않으며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잘릴 수도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취미가 골프로 바뀔 수도 있으며 아버지가 주식으로 돈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다. 생각과 느낌이야 말해 무얼 할까,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다. 정말 이런 요소들로 그를 설명해도 괜찮은 걸까. 상황이 바뀔 때마다 옛날에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며 아쉬워하거나 실망해도 괜찮을 걸까.


나의 몸, 나의 물건, 나의 사람, 나의 느낌, 나의 생각. 이런 것들을 '나'라고 할 때 나는 유머를 잃고 심각해지기 일수였다. 나의 몸이 있다 생각하니 외모 콤플렉스에 자유로울 수 없었고 나의 물건이 있다 생각하니 상실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나의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들의 실수가 마치 나의 실패처럼 여겨져 그들에게 더 집착했다. 나의 느낌이 있다 생각하니 나쁜 감정이 저절로 올라왔을 때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의 가치관을 세우고 공고히 다진다는 것은 꽉 막힌 꼰대가 된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나'라는 존재마저도 인연에 따라 변주될 뿐 매번 변화하여 고정된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이 나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몸무게, 삶의 무게, 생각의 무게에 늘 짓눌려 사는 내게 작은 구멍과 같은 말이다. 장바구니에 책 한 권을 넣었다 뺐다 하며 누군가의 유복한 삶을 부러워 할 때도, 너 많이 변했구나라는 친구의 아쉬운 목소리에도, 무언가가 되려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려는 나를 볼 때도, 잠깐 멈추라고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경제적 위기를, 관계의 종식을 '나'의 실패로 여기지 않을 여유가 생겼다. 욕망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자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라고 할 게 없다고 해서 '나'를 잃는 게 아니다. '나'라고 할 게 없는 '나'가 있을 뿐이다. 크게 휘둘리지 않고 너무 심각해지지 않고 적당한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으로 가볍게 살고 싶다. 이런 생각과 다르게 법문같이 지루하고 무거운 오늘의 글 어쩌면 좋을까. 하긴 이 글 역시 오늘의 궁여지책일 뿐, 매일매일 변하는 게 '나'라고 변명하며 지금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위로한다. '나', 그 알 수 없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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