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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27. 2021

그리움 앞에 나를 붙잡아 둘 순간

 


책과 피아노.

신이 내게 보낸 이 두 개의 선물은 내 삶을 말랑하게, 그리고 낭만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내게 이 둘은 항상 함께 하기에 너무 벅찼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어요, 같은 분위기 있는 순간이 내게는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곳에 있으면 그 누구에게도 집중할 수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양다리를 걸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뒤로 밀리는 것은 음악이다. 자투리 시간에만 음악을 찾는다. 내가 겨우 널 만나러 왔어, 같은 애틋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출근길과 퇴근길. 혼자 걷는 20여분은 피아노곡 1~2개를 듣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볼까 골라보는 것도 즐겁지만 똑똑한 AI가 선정한 듯 이 날은, 이런 때는, 이런 곡을 들으세요하고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곡들이 있다. 비가 올 땐 빗방울 전주곡, 달밤엔 달빛처럼 상투적인 경우도 있고 다분히 개인적으로 플레이되는 자동 선정곡들도 있다.


나에게 노을 하면 떠오르는 곡은 쇼팽의 '뱃노래'다. 노을을 보며 뱃노래를 들었던 추억의 한 장면으로 인해 개인적인 AI가 작동되는 까닭이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환상적인 낭만풍의 피아노 소곡들이 사랑을 받지만 나는 밝고 화려한 폴로네이즈풍의 곡들을 더 좋아한다. 쇼팽의 '뱃노래'는 차분한 녹턴과 그랜드 폴로네이즈 그 어느 사이에 있을 것 같은 곡이다.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길고 유려한 멜로디가 때로는 쓸쓸하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흐른다. 해가 다 지기 전 파아란 하늘에 서서히 붉은 기운이 서리다 점점 그 기세가 더해가는 순간, 고단한 해가 저물고 하루의 먼지를 떨구는 시간. 피아노 소리는 조용하게 속삭이고 유유히 노래하다 어느새 붉디붉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쇼팽을 좋아한 철학자 니체는 어느 글에서 뱃노래에 대한 찬사를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든 모든 인생에는 행복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훌륭한 예술가들은 그것을 찾아내는 법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의 생활,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욕심 많은 천민들 가까이에서 전개되는 그렇게 권태롭고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삶에도 축복된 순간이 있다. '뱃노래'에서 쇼팽은 이 행복의 순간을 참으로 훌륭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것을 듣는다면 신들조차도 나룻배에 누워 긴 여름밤을 보내고픈 마음이 들 것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어느 봄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 저녁놀에 취한 발길이 못내 아쉬워 동네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정처 없는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만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높은 지대의 아파트 입구에 오르니 멀리 내려다보이는 하늘이 이젠 절정을 향해 가는 듯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꼼짝 않고 서서 노을을 바라보며 흘러나오는 노래에 마음을 모았다. 눈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정직하고 순수한 기쁨'의 순간. 10여분이 어느새 물 흐르듯 흘렀고 그 물에 마음이 촉촉이 젖었다. '따단!' 강열한 마지막 음이 '이제 되었다, 돌아가자'라고 선언했다. 사위는 조금 더 어두워졌고 나는 말랑말랑해져서 돌아왔다.






덧붙임:


오늘은 8월 27일 금요일입니다. 그날의 날짜를 손으로 쓴다는 것은 흩어지는 꽃잎 중 하나를 책갈피 삼아 책에 고이 넣어두는 일 같습니다. '뱃노래' 연주곡 중 제일 좋아하는 연주입니다. 니체가 '신들조차도 나룻배에 누워 긴 여름밤을 보내고픈' 마음이 들었을 축복의 순간은 이런 것일까요? 글을 쓰느라 이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새벽과 아침을 보냅니다. '정직하고 순수한 기쁨'의 순간, '그리움 앞에 나를 붙잡아 둘 순간'을 이렇게 하나 더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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