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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01. 2021

1.친애하는 나의 친구 은성에게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친애하는 나의 친구 은성에게

   

 은성아, 굿모닝. 너도 지금 이 순간 너의 공간에서 졸고 있으려나? 오늘은 잠이 잘 깨지 않네. 눈꺼풀이 역기보다 더 무거워. 이왕 일찍 일어났으니 척척 할 일을 해내고 싶은데 말이야. 잠을 깰 뭔가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펜을 들었어. 8월은 매일 함께 책 읽기를 격려하고 글쓰기를 독려한 한 달이었어. 너의 권유로 시작한 새벽 기상 한 달째, 하루도 빠짐없이 일찍 일어나다니 스스로에게 100점 주고픈 시간들이었다. 글 한 편 쓰려면 일주일도 더 걸리던 내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하루에 한 편씩 써보려 애쓴 달이었어. 넌 어때? 오늘 올린 너의 글 은 질투가 날 정도로 좋더라.   

   

『시대는 뒷걸음질 치는 법이 없으니 두렵다면 내가 쫓아가는 것이 맞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지금은 ‘지금까지 잘 쫓아왔으니 됐다, 앞으로의 것들은 좀 더듬거려도 된다,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지 뭐.’라고 해두고 싶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중에서 』


 특히 마지막 문장이 꼭 '사노 요코'의 글을 읽듯 담백했어. 너는 ‘누구누구 같은’ 이란 수식어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누가 내 글을 사노 요코 글 같다고 했다면 난 너무 좋아 팔짝 뛰었을 거야!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를 만들어간다는 건 글쓰기 연습만으로 되는 일 같지는 않아. 사람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이 문체를 이루잖아. 고유한 문체는 고유한 사람으로부터 오는가봐.      


 나는 처음엔 글이란 게 백지를 앞에 두고도 써진다는 게 신기했는데, 점점 손은 가만히 있고 모니터만 노려보게 되는 시간이 길어지더라. 다 어디서 보던 글인 것만 같아서 ‘그만 둘까’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자주 들려와.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목표를 스스로 세우고 혼자 흥분했다가 지쳐버리는 것도 한결같지? ‘그동안 해 온 것이 아까워도 지금 즐겁지 않다면 그 완성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든 좀 더 해보려고 애쓰게 된다.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 때론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을 힘이 되어준다.     

 

 그러나 물러서는 게 나은 지 밀고 나가는 게 나은 지 고민되는 것들은 여전히 많아. 그 고민의 결과, 해 오던 것 중 하나인 <신곡> 완독은 결국 포기했어. 이제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한 달 넘게 끌어온 책을 덮어버렸다. 읽었던 데 또 읽고, 읽기만 하면 눈이 감기고, 내가 이걸 왜 읽지 고민하게 만드는 책을 글자만 읽고 있다는 게 회의감이 들어서 말이야. 시원섭섭하네. 완독해 보겠다고 온라인 모임에 신청해서 유튜브 강의도 듣고 참고자료 찾아가며 열성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열정이 사라져 버렸어.      


 작은 불씨를 살려보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등을 검색창에 쳐보기도 했다. 포기의 주원인은 온라인으로 처음 해보는 독서토론모임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따라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지 뭐. 그동안 '책 좀 읽었어요' 하는 자만심이 여지없이 깨져버리는 귀한 경험이었어. 세상은 넓고 똑똑한 사람은 너무 많더라. 어제 학원에서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다짐하고 책을 덮어서 책장 높은 곳에 올려버리고 집에 가져오지도 않았어. 마지막 독서토론 모임이 있는 목요일까지 혹시나 책이 눈에 띄면 좀 더 읽어볼까 하는 미련이 생길까 봐. 잘했지? 너도 천국편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그 말에 위안을 좀 받았지. 다음에 같이 읽어볼까? 매일매일 너와 함께 조금씩 읽는다면 뭐 끝까지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당장은 아니지만.   

  

 어제,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사랑의 역사>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오는 거야.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쓴, 소설 속의 글이 너무나도 매력적인 책이었어.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아마데우의 문장들로 더 오래 기억되듯, 이 소설도 주인공 레오가 쓴 글의 문장들로 오래 기억될 것 같아. 전쟁으로 인해 사랑, 가족, 우정, 글까지 모두 잃어버려야 했던 레오. 친구의 소설을 훔친 즈비,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책에서 이름을 따 온 열네 살 소녀 앨마.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가는 것도 흥미로웠어. 느림보 거북이 같던 소설이 결말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하자 진실은 도대체 뭐란 말이야, 밝혀줄 사람 아무도 없이 이 이야기는 쓸쓸히 끝나고 마는 걸까 조바심이 났어.  아, 아쉽지만 여기까지. 더 이상 말하면 네가 책을 읽고 싶어지지 않겠지. <사랑의 역사>중 마음에 들었던 한 부분을 발췌해서 보낼게. 며칠 전 네가 보여준 빌리 콜린스의 시 <첫 꿈>과 느낌이 비슷해. 인용구가 네 마음을 톡톡 건드려 줄 수 있다면 좋겠어. 함께 읽고 만나서 마음껏 수다를 떨고 싶은 책이야.      


 은성아, 시간은 긴 둑방길 끝에서 다가오는 자전거 같아. 천천히 오는 것 같아 조급함이 일어도, 막상 앞을 지나쳐갈 때는 순식간이야. 어느새 기다리던 가을이다. 사랑스런 가을의 시작을 24년째 너의 생일과 함께 맞이해서 기뻐. 9월은 여러모로 바쁘겠지만 달력의 첫 장을 앞에 두니 설렌다. 우리의 가을과 겨울을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볼까? 기대와 의욕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내 마음을 인증사진 찍어서 보내고 싶다. 외로움을 달래주고 기쁨을 선사할 너의 새 친구들도 잘 도착했어? 누군지 궁금하니 올해 생일 선물로 받은 책들 사진도 보내줘. 며칠 전 주말에 만났을 때도 쉬지 않고 여섯 시간 넘게 책과 글 이야기만으로 입이 빠짝 말랐었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도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해. 이러다 지각하겠어. 생계를 위해 수다를 접는다. 우리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감정의 탄생     

누군가가 막대기 두 개를 맞대고 비비다가 처음으로 불꽃을 일으킨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기쁨이 느껴진 순간, 처음으로 슬픔이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한동안 새로운 감정들이 계속해서 발명되었다. 욕망은 일찍이 생겨났고 후회도 마찬가지였다. 완고함이 처음으로 느껴졌을 때, 그것은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편에서는 원망이, 다른 한편에서는 소외와 외로움이 생겨났다. 반시계 방향의 어떤 골반 동작이 황홀경의 탄생을 촉발했을 것이고, 번개의 일격이 최초의 경외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니면 앨마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몸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불성설 같지만, 놀라움의 감정은 초기에 바로 탄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충분한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모든 것의 기본 양태에 익숙해지고 난 후에야 생겨났다. 그리고 실제로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가 최초로 놀라움의 감정을 느꼈을 때, 다른 곳의 다른 누군가는 최초로 찌릿한 향수를 느꼈다.

때로 사람들은 무언가를 느끼고도 그것을 표현할 말이 없어서 언급 없이 지나가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감정은 아마도 감동일 텐데 그것을 묘사하려 하면-이름만 붙이려고 해도-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감정은 그냥 혼란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은 욕망도 커졌다. 이따금 심하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더 많이, 더 깊이 느끼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감정에 중독되었다. 새로운 감정들을 발견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예술은 바로 이런 식으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종류의 기쁨이 새로운 종류의 슬픔과 함께 만들어졌다. 예컨대,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영원한 실망, 예상치 못한 유예가 주는 안도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지금도, 모든 가능한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능력과 상상력을 넘어선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때때로 지금껏 아무도 작곡한 적 없는 음악, 아무도 그린 적 없는 그림, 혹은 예측하거나 가늠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생겨날 때, 새로운 감정이 세상에 들어온다. 그러고 나면, 감정의 역사에서 수백만 번 그러했듯이, 심장이 부풀어 올라 그 영향을 흡수한다.    <사랑의 역사> p165~166』     


2021. 9.1

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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