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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10. 2021

3.긴팔, 긴바지를 챙겨 입었을 은성에게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긴팔, 긴바지를 챙겨 입었을 은성에게


 아침에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비님이 다녀가실 때마다 점점 줄더니 어느새 풀벌레 소리로 바뀌었어. 낮에는 여전히 땀이 비질비질 나는데 새벽엔 카디건을 하나 꺼내 입어야 할 것 같은 날씨다. 아직 컴컴한 이 새벽, 너의 '빅브라더'가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 궁금하네. '자유, 자유 하면서도 빅브라더의 감시 속에 스스로를 놓아버린다'는 너의 그 말에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몰라. 8월 시작에 의기충천으로 빠짝 긴장상태로 열심히 했는데 9월은 상대적으로 좀 주춤한 느낌이야. 빅브라더의 감시 속에서 더 큰 자유를 느껴보려다 역시나 좀 무리를 했나 싶어. 혼자서 지키겠다고 짠 계획들은 갖가지 핑계들을 대며 표류 상태로 접어들었다. 먼 길을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백번 공감하며 인증 독서는 순항중이야.     


 9월엔 '덕질'과 '추억의 빵'을 소재로 받아 두 편의 글을 적었어. 글쓰기를 시작하며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지만 유독 이 열흘간은 20대의 나를 추억하는 시간이 되었어. 불과 얼마 전의 일들 같은데 벌써 이십 년이나 더 흘렀더라고. 세월이 나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가나 봐. 구체적으로 잘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던 일들도 막상 떠올리려니 애매하더라. 일기장을 펼쳐 읽어보고선 깜짝 놀랐어. 정말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많더라고. 나 스스로 그만둔 알바라고 생각했던 것이 해고 통보를 받았던 것으로 적혀 있었고 한 번도 싸운 적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한테 얼마나 많이 토라지곤 했던지. 몇 번이나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놀러 갔고 믿고 의지한다고까지 적혀 있던 일본인 아주머니 '호시노 상'은 유령이었던 게 아닐까 싶게 일기장에서만 존재하고 계셨어.     


 십, 이십 대 추억의 많은 부분들은 일본문화와 함께 저장되어 있더라. 문화의 향유도 끝말잇기 같아 한 책이 비슷한 책을 부르고 한 영화가 다른 영화를 부르잖아. 방울방울 떨어지는 추억 비에 젖어 smap의 영상을 찾아보고 x-japan의 노래를 들었어. 해체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은 어느새 오십이 되었고 요절한 록의 영웅이 절규하는 노래도 전처럼 애잔하지 않더라. <4월 이야기>를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았는데 조금 두렵더라고. 작년에 <러브레터> 후속작, <라스트 레터>를 보고 이제 더 이상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설레는 때는 지났구나 싶었다. 20대가 저 스스로 유유히 지나가버렸듯 벚꽃 날리는 봄날도 잠시 잠깐 스쳐간 것 같아. 빨간 우산 속 수줍은 미소가 아름다웠던 마츠 타카코도 중년의 여인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 것이 당연하지만 추억의 스타들은 왠지 나이가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일본 영화의 끝말잇기 놀이에 나를 끌어들였던 청년시절의 우상,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시대는 내 인생에서 막을 내렸다.   

  

 중년의 감성을 묵직하게 자극하며 바통을 이어받은 영화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야. 그의 영화는 볼 때마다 '이 작품이 제일 좋은 걸' 하고 매번 생각하게 만들어. 그래서 누가 '그 감독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참 난감할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봐도 다 좋아. 특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한 일상 속에 녹여낸 작품들이 오래 마음을 흔들었던 것 같아. 가정을 깨뜨린 여자의 딸을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고 묻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나 아들이 죽으며 살려낸 아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걸어도 걸어도>도 같은 영화도 여운이 오래 남더라. 핏줄 vs 키운 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가족 이야기를 다룬 <그렇게 나는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서는 식구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이다 언성이 높아지고 울음까지 터트리고 말았어. 그렇게 매번 묻고, 묻고, 물어서 그 감독의 영화는 질리지 않나 봐. 숙제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문제만 던져주는 선생님 같아. 답이 없어 답답해도 그 맛에 자주 찾게 되나봐.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고레에다 감독의 첫 영화 <환상의 빛>도 그랬어. 가난하지만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유미코. 갑작스러운 남편의 자살로 갓난아이와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 '남편은 왜 자살을 했을까'하는 질문이 수수께끼처럼 이어지는 작품이야. 그러나 남편의 자살 이유를 파헤쳐가는 이야기는 아니야.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환상의 빛> p80'을 가슴속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어.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죽음의 이유가 필요한가? 그러나 그걸 밝혀낼 수 없다면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더라고. 너무 매혹적인 질문이었어. 너는 어때?     


  언젠가 J선배가 쓴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 서평이 참 인상적이었어. 미야모토 테루란 소설가가 궁금했는데 마침 <환상의 빛> 원작자란 것을 알게 되었지. 그와 만날 첫 책으로 이 작품을 고르고 영화도 같이 봐야지 하며 찜해두었어. 소설이 초반부는 분위기를 만들고 복선들을 배치하느라 재미가 좀 없다가 마지막 한 방을 노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주된 스토리 없이도 첫 페이지부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문장 한 문장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 작품도 있잖아.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후자 쪽이야. 심장에 커다란 돌멩이를 달아 저 깊은 바다의 심연으로 떨어뜨리는 느낌의 소설이었어. 천천히 묵직하게 내려앉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거친 파도 소리가 무색하게 다 읽고 나면 바닷속은 무척 고요하여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평화로워지는 그런 글이었어. "돌아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대답만 해주세요."란 문장이 "아아, 이것이 불행이라는 것이구나" 고 담담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독백이 먹먹함을 배가시켰어.    

 

 사람을 홀리는 환상의 빛과 소소기 해변의 파도와 바람 소리, 읊조리는 그녀의 독백과 인상적이었던 결말 부분을 영화에선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소설만큼이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늘 생각해왔지만 '환상의 빛'은 '영화 V S소설', 선택하라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 같아.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짧은 중편 소설 VS 1시간 40분의 장편영화, 너의 선택은 무엇인지 답을 듣고 싶어.     


 곳곳의 빛이 주는 이미지를 강렬하게 살렸고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어. 그곳이 소소기라는 해변에서 실제로 찍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도 유미코처럼 보통 열차와 급행 기차를 갈아타고서 소쿠노토의 소소기라는 해변 마을에 한 번 가보고 싶어졌어. 너와 이름도 모르던 역에서 길을 잃고 새해를 맞이하던 그때를 추억하며 함께 덜컹이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싶다. 지겨울 때 즈음에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환상의 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에 대한 감상은 그때로 미루고 이제 출근 준비를 해야겠구나. 어느새 새벽이 지나고 아침을 뛰어넘어 시곗바늘은 12시를 향하고 있네. 이렇게 오래도록 혼자 떠들어놓고서도 못다 한 말이 너무나 많아.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추신1. 오늘은 편지에 온 마음을 쏟았어. 그래서 아직 오늘분 독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네. 신데렐라처럼 12시가 되기 전에 인증샷을 날릴게.

추신2. 우리는 책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영화 본 이야기는 잘 나누지 않는 것 같아. 갑자기 너의 최애 영화가 궁금해진다.     


2021.9.10.

문득 기차 여행을 떠올리며 흐뭇한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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