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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16. 2021

5.여전히 '개업빨' 받고 있는 은성에게

이슬아 vs 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여전히 '개업빨' 받고 있는 은성에게

 

 우와, 아침에 굉장한 바람이 부네. 문을 살짝 열어뒀더니 바람이 창문과 함께 덜컥이며 쇳소리를 내는데 그 기세가 대단해. 우리가 요즘 읽고 있는 <일리아스>의 전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날씨야. <일리아스>에서 140페이지까지 이어지던 지난한 대립과 일대일 격전이 끝나고 드디어 백성들이 말없이 전진하던 부분을 읽던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곧 아카이오이족과 트라이아인의 살벌한 육탄전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쉴 새 없이 창과 돌이 날아가잖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엄숙하면서도 스산한 느낌의 바람이야. 이렇게 <일리아스>의 일부분을 떠올리며 편지를 시작하니 잘난 체하는 것 같아 쑥스러워도 기분이 좋다. '신곡'을 읽으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어 분통을 터트린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뭔가 일취월장한 듯 뿌듯해. 매일 조금씩 함께 읽으니 엄두가 안 나던 두꺼운 고전 읽기도 재미가 쏠쏠하네. 한 달 반이란 여정이 남았지만 우리 이 벽돌 책 한 권 끝내는 날, 함께 축배를 들자.     


 은성아, 이번 편지도 잘 읽었어. 생각보다 답장이 빨라서 깜짝 놀랐어. 나는 '시작빨'이 조금 떨어진 것 같지만 넌 '개업빨' 여전한 것 같아. 선뜻 너의 두 번째 편지를 예고 없이 받고 나니 편지란 것이 대본 없는 즉흥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좀 미리미리 준비파잖아. 일을 할 때 시간에 쫓겨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게 버거워. 그래서 편지 쓰기를 계획하고 나서 너와 나누고픈 이야기들이 떠오르면 노트에 간략히 적어두곤 했는데 그 소재들을 하나도 꺼내 써먹지 못하고 세 번째 편지까지 왔네. 너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게 참 좋아.     


 이슬아와 남궁인의 기획 서간집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어보면 '남궁인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라는 재미있는 챕터가 하나 있거든. 서간문을 마무리하며 이슬아가 그동안 서로의 주어 사용을 중심으로 상대를 향한 집중도 연구의 결과를 통계 자료로 제시하는 거야. 이슬아 작가가 낭궁인 선생을 이렇게 몰아세우지.     


 『'선생님이 쓴 지난 편지의 상당 부분은 저라는 수신자가 없었어도 쓰였을 글이라고 느껴집니다. 다른 연재 파트너와 편지를 주고받았더라도, 심지어는 파트너 없이 혼자서 연재를 했더라도 남궁인의 이야기는 언젠가 쓰였을 듯합니다. 그러면 안될까요? 당연히 됩니다. 그저 아쉬울 뿐이죠. 하필 이 두 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쓰이는 이야기가 서간문의 매력이잖아요. 서로를 경유한 문장을 생각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번갈아가며 자기 얘기를 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p205


 나 역시 시작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 편지가 매끄러운 전달매체로서의 역할을 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특별한 기대 같은 건 없었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받고 다시 넘겨주는 일은 긴장되지만 색다른 즐거움을 주네. 물음이 대답을 유도했고 대답이 또 다른 질문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만들었어. 편지를 받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궁금한 건 당연한 즐거움이고 나의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신선해. 그것이 서간문의 본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독보적 매력인 것 같긴 하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물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유영하는 느낌이야. 애써 팔을 휘두르거나 발을 차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는 편안함이 있어. 사선으로 가거나 느리게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레인의 끝에 다다르겠지. 다다르지 않으면 또 뭐 어때, 물 위에 한가로이 떠있는 것만으로도 힐링 그 자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예전에 읽고 보았던 작품이야. 그 재밌는 소설을 읽고도 영화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의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 나는 소설로 읽은 작품은 꼭 영화로 보고 싶거든.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서는 두 편의 영화와 8부작 드라마까지 챙겨보았어. 이 소설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나 <나를 보내지 마>(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영화로 성공할 거란 기대는 접었지만 일본 드라마로 만든 이 작품은 영화보다 한 열 배는 더 재밌었어)처럼 영화나 드라마가 소설보다 낫다고 느낄 때도 아주 간혹 있긴 하지만 대체로 실망하고 말아. 그래도 매번 재밌게 읽은 소설이 영화로 재탄생하길 기대하게 돼. 주인공들 캐스팅까지 마음속으로 찜하며 스스로 감독이 되기도 하고 말이야.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배울 때가 재미있지 턴까지 해가면서 잘 타게 되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진다'는 너의 말은 비유만큼이나 참신한 관점이었어. '너무 잘 보이면 더 이상 책을 읽을 재미가 없어질 거라는' 그런 여유로운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니? 나는 작가에게 가 닿고 싶어 하고 너는 너에게 가 닿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네가 한없이 멋있어 보였다. 독서 리뷰들을 읽으며 '어떻게 저런 해석을 하지? 같은 책을 읽은 게 맞을까?' 하며 타인의 시선들에 대해 혼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꽤 즐기는 편이지만 나는 여전히 내 생각을 확신할 수 없어서 누군가에게 계속 동의를 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방식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란 것도 알지만 유유히 롤러장을 달려보고 싶다고나 할까. 그래도 너무 잘 타려고 나를 들볶는다 싶을 땐 너의 말을 떠올려 볼게.     


 날은 밝았지만 바람은 그칠 기미가 없이 나무를 더 세차게 흔든다. 스산한 바람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창을 닫고 말았지만 오늘은 이 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출근을 할까 해. 시원한 가을바람일지, 나를 뒤흔들 폭풍의 전야제가 될지 모르지만. 밥을 한 끼라도 먹지 않으면 손이 떨리는데, 밥을 안 먹어도 기운이 하늘을 치솟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수다' 역시 입으로 나오고 들어가는 행위라 그런가. 과식은 소화불량을 불러올지 모르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지만 다음에 만나서 하자. 그럼 이만 총총     


추신 1. 그래도 이 질문의 답은 듣고 싶어.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이라는 남궁인 vs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문득 남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이라는 이슬아.너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 궁금해.


2021.9.15

사실은 마음의 양식만으로는 몸의 허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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