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Oct 08. 2021

9.말랑말랑 유쾌한 은성에게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말랑말랑 유쾌한 은성에게

 

 은성아,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다, 라고 쓰려다 다시 일어나 밖을 봤더니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었어. 건너편 집들과 가로등에 불이 제법 많이 켜져 있네. 나 너무 상투적인가. 스포트라이트를 홀로 받고 있는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스탠드 불빛 밑 내 자리만 밝아. 내 주위가 밝으면 세상이 다 밝은 줄 알고, 내 주위가 어두우면 주변이 다 어두울 거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며칠 전 화장실로 달려오라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컴퓨터 앞에서 자판만 두드리며 연이어 방귀를 뀌고 있었어. 내가 건성으로 '미안해, 미안해' 반복하니 옆에 앉은 혜령이가 덤덤히 '엄마 차라리 똥을 누러 가' 그러는 거야. 부끄럽고 미안해지면서 내 세계에만 갇히면 가까운 이에게 제일 지독한 '독가스'를 풍기게 되는구나 싶더라. 책상 의자에서 엉덩이 한 번 떼는 게 힘든 일도 아닌데 무심하고 게을렀다 싶어. 밖이 얼마나 어두운지, 또 어떻게 변해 가는지, 한 번씩 몸을 일으켜 내 눈으로 확인도 해 보고 관심도 가져보고 해야겠어. 창문 너머로 바람을 가르는 차 소리가 한 번씩 들렸다가 사라지고 대충 내린 커피는 쓰디쓴 새벽이야.     


 너의 편지 잘 읽었어. 보리차를 끓이다가 레빈을 떠올리며 일상의 의미를 되새기고, 무심히 보고 지나쳤던 명화 하나를 너의 마음에 들여놓았다고. 문학과 예술을 온전히 삶에 녹여낸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며 나도 감탄했다. 너는 온몸과 마음으로 너의 삶을 사랑하고 있구나 싶었다.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이 왜 명화였는지 지식이 아닌 온몸으로 이해될 때의 환희를 생생하게 전해줘서 고마웠어. 그러고 보니 '시들어빠진 시금치 같은 너'는 자주 보지 못했던 것 같아. 너는 시마다 요이치의 '할머니'처럼 제법 유쾌한 사람이야. 징징거리거나 풀이 푹 죽은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 당장 '오징어 게임'을 봐야겠다"하며 J와 다짐했고 그날 밤 '오징어 게임' 세 편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없다는 그 흥행 작품은 생각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너는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나는 너의 낙천성과 여유로움을 사랑해.     

 두근거림의 유통기간이 다 지나 설렘 대신 익숙함만 남은 오래된 연인이 잊었던 매력을 발산하며 다가오는 것 같은 글구가 있었어.


지금 이 순간에 전념하는 것은 삶에 필요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차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대하면 훨씬 여유가 생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밖에 없으므로 나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지금 이 순간을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들라는 뜻이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고요함의 지혜> p51


'나는 절대자의 숨결이 흐르는 피리의 구멍입니다. 이 음악을 들어보세요'라고 오프라 윈프리에게 자신의 책을 건넸다는 에크하르트 톨레. 그의 두 번째 책으로 '고요함의 지혜'는 200개의 간결한 경구를 담은 130 페이지 분량의 얇은 책이야. 누구 집 서재에나 먼지 쌓인 채 한 권 즈음 꽂혀있을 것 같은 명상서적. '지금, 여기를 살아라'는 귀에 딱지 않도록 들어온 말,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서 쓴 문장처럼 비슷비슷해 보이는 내용을 담은 책이지. 간절하게 와 닿아도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좋은 말씀'을 담은 글들을 물론 자진해서 읽은 건 아니고 숙제야 숙제. 불교대학 이번 학기 교재 중 한 권이야.     


 혹시 <스트로베리 온 더 숏 케이크(Strawberry on the short cake)> 라는 일본 드라마를 본 적 있니? 일명 S.O.S(Save our Souls)이라 불리며 2001년도에 방영했던 드라마라 좀 오래되긴 했다. <고교 교사>, <인간실격>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룬 일본 대표 각본가 노지마 신지의 작품이야. 노지마 신지의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작품들을 다 좋아했어. 하나도 빠짐없이 보려고 비디오 가게와 웹사이트를 뒤집고 다녔었는데. <오징어 게임>에 호응해 줄 친구가 없어 열심히 권하기밖에 할 수 없던 너의 그 마음이 노지마 신지를 소개하는 내 마음과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 이 마음 알지?(간절한 눈빛 발사) 약간 말랑말랑해질 무렵의 작품이긴 하지만 이복남매의 사랑과 영원한 숙제 짝사랑을 주제로 잔잔한 독백과 아바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쉴 새 없이 마음을 흔들던 드라마였다.     


 은성아, 너는 딸기가 한 조각 얹힌 조각 케이크를 먹을 때 딸기를 먼저 먹니? 아꼈다 제일 마지막에 먹니? 나는 제일 맛있는 딸기를 아꼈다가 마지막 한 입에 넣을 때, 그 만족감이 참 좋았어. 월드콘의 초코 꼭지와 아이스크림을 위아래로 적절히 남겨 마지막 한 입에 쏙 넣었을 때처럼 상큼함과 달콤함을 같이 느끼는 거지. 제일 맛있는 마지막 한 입은 항상 아쉬움을 남기고 또 그것을 찾고 싶게 만드는 여운의 묘미까지 주거든. 그제야 '아, 다 먹었구나' 하며 만족스러워지는 거야. 그런데 요즘엔 한 조각 케이크도 다 먹으려니 느끼하고, 먹는 도중 배가 불러와서 딸기를 맛있게 먹을 수가 없더라.

      

 이 드라마의 제목은 딸기를 대하는 자세를 통해 사랑의 방식과 성격 등을 판단하는 물음으로 쓰였어. 지금의 만족과 미래를 위한 아낌,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묻는 질문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마시멜로의 유혹을 이겨내야 성공할 수 있다면서도 '아끼다 똥 된다'라고 딸기를 당장 먹어버리라고도 하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은 현재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 같고 사과를 베어 물고 누워있는 사람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해.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재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미래가 어김없이 도래해 '지금'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래서 기적일지도 모르는 현재는 익히 알고 있는 선물을 풀어보듯 심드렁해져 버렸다.    

 

 이것이 나를 설레게 했던 연인에게 심드렁해진 이유였을까. '지금을 살라'는 말이 나는 '딸기 케이크 위의 딸기를 지금 먹어라', '해야 할 일 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라'는 말로 해석해 왔어. 익숙한 잔소리처럼 귓등으로 들으면서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것을 부정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았지. 해야 하는 일에 얽매여 하고 싶은 일이 뒷전으로 밀리면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에크하르트의 말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어. 무슨 일을 하든 '지금 이 순간을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들라'는 말이었더라. 매번 듣는 말이니까 다 안다고 엉덩이 떼고 일어나 보지도 않고 구식 번역기만 돌려대진 않았나 싶다.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차 한 잔과 함께 책상에 앉는다. 매번 녹차, 커피, 얼그레이, 페퍼민트 도돌이표 만난 것처럼 빙빙 돌다가 일주일이 후딱 가네. 어제 마트에 들렀다가 문득 보리차가 마시고 싶어졌어. 정성껏 끓인 보리차는 아니지만 너를 생각하며 마셨다. 야호~~ 오늘은 금처럼 반짝이는 금요일이다! 수요일부터 쓰던 편지를 자꾸 썼다 지웠다 하느라 시간이 훌쩍 갔어. 금요일에 누르는 전송 버튼, 쾌감 두 배!! '코로나' 보다 '마스크 알레르기'에 더 민감하다 보니 바깥공기 좋아해도 산책이 내겐 부담스러웠어. 아무리 덥다 해도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면' 콧노래 흥얼거리며 들판으로 나서고 싶더라. 며칠 전 코스모스 피었다는 말에 카메라 목에 걸고 가을을 담아 왔다. 노출 설정이 오버되었는지도 모르고 몇 장 찍었는데 마침 수채화 같은 느낌의 사진이 찰칵. 너에게 나의 가을을 보낼게. 너의 가을 이야기를 기다리며 그럼 이만^^   

  

추신 1. 은성아 요즘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네. 그럼에도 너의 그림 이야기를 읽고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을 구입했어. 어떤 책일까 기대된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같은, 그런 책이었으면 좋겠다.     


2021. 10.08

주말 보충 수업을 친구로 만들어보려는 승희가.               


매거진의 이전글 13.눈물을 왈칵 쏟은 은성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