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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Oct 15. 2021

11.붕어빵의 머리부터 먹는 은성에게

줄리언 번스 <아주 사적인 미술관>

붕어빵의 머리부터 먹는 은성에게

 

 은성아, 굿굿굿모닝, 내 기분이 너무 확 드러나는 아침인사지? 쌀을 씻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니 제법 오랜만에 식사 준비를 한 아침이야. 압력솥의 추가 쌕쌕거리며 몸을 마구 돌리고 미역들이 천적에 쫓긴 피라미떼처럼 북덕북덕 솟아올랐어. 스팸도 노릇노릇 굽고 김치랑 깻잎도 꺼내 잘랐어. 먹을 것보단 뿌듯함이 더 많이 올라간 식탁을 뽐내려고 "오늘 아침은 미역국이야" 하며 령이를 재차 흔들어 깨워보았지만 실패. 혼자서 식탁에 앉아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래서일까, 힘이 더 나고 햇살도 더 환하게 느껴진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날의 오전, 음악 들으며 이 책 저 책 꺼내 밑줄 한가득 쳐진 구절들을 다시 읽어도 보고 그림책들도 설렁설렁 넘겨봤어. 굵은 별표가 여럿 그려진 문장 앞에서 죽마고우를 만난 듯 반가워 한참 재회의 감동을 만끽했어. 맞아, 나 오늘 땡땡이야. 운동하러 가지 않고  오전에 내 책상 의자에 앉았어. 공짜로 받은 시간 같아서 더 여유롭네.     


 은성아, 나도 붕어빵은 머리부터 먹어. 근데 머리가 제일 맛있어서는 아니야. 반죽이 얇아 더 파삭한 꼬리 부분을 좋아해. 팥을 좋아해서 몸통을 두 동강 내어 배부터 먹어야 할 것 같지만 파삭한 껍질과 달콤한 팥이 한 입에 쏙 들어와 마무리되는 게 좋아. 그래도 찬바람이 더 씽씽 불면 뜨끈한 붕어빵 사서 이번엔 꼬리부터 먹어볼래.      


 나는 요즘 '국민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 또 푹 빠졌어. 이번엔 장르가 트로트가 아니라 K-pop이라 3시간 꼼짝 않고 봐도 허리가 아프지 않더라. 13인의 마스터 전원이 하트를 누르면 축포탄이 화면에서 팡 터지잖아. 그런데 '어떻게 하트를 안 누를 수가 있지?' 하고 이해가 안되어 안타까워하는 장면, 호평과 혹평이 같이 쏟아지는 장면도 가끔 나오더라구. 그 장면들을 보니 요즘 새삼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많이 느끼듯 다들 생각하고 느끼는 게 다 다르구나싶더라. 우리 둘의 의견도 좀처럼 일치하기가 어려운데 13명이 동시에 하트를 누를 확률은 1/8192, 기적 같은 일이긴 하다.     


 '좋다'라고 느끼게 되는 결정적 한 수가 노래실력, 목소리톤, 음역대, 곡을 재해석하는 능력, 감정표현 등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 나는 섬세하게 노래 실력을 따질 수 있는 수준 높은 청취자는 아니라 분위기로 좋다 아니다 판단하는 편이야. 막귀라 대체로 하트를 후하게 날리지. 신파 드라마의 만들어진 억지스런 감동 유발 장면에도 제작자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주는 어리숙한 시청자처럼 사연 있는 참가자는 무턱대고 응원하기도 하고. '꿈과 도전', '역경과 성공', 견우와 직녀 같은 이 단어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다 내 눈앞에서 만나는 감동을 전화투표로 꼭 보답하는 의리 있는 시청자이기도 해. 한 번씩 네가 좋았다고 하는 음악을 정말 빠짐없이 한 번은 들어보거든. 그럼 대체로 '어머, 이건 내 취향' 하고 다시 듣게 되는 경우가 음악에서는 더 드문 것을 보면 분명 우리의 취향은 장르불문 제법 다른 것 같긴 해. 그래서 '서양미술사' 나 '안나 카레니나'처럼 우리가 함께 좋아한 책들은 올 하트가 터지는 영예를 누리는가 보다. 네가 하트를 누르는 지점은 과연 어느 부분일까 새삼 너무 궁금해진다.     


 나는 '어떻게 저 곡을 저런 식으로 부를 수 있을까'하는 느낌이 들 때 마음속의 하트가 터지는 편이더라. 책도 그런 것 같아. 자주 느꼈지만 흔한 표현으로 밖에 그려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선명하게 그려 보여주거나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상의 것들을 해석해내는 책들을 만나면 무턱대고 일단 하트를 누르게 된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도 두 챕터를 읽었는데 하트를 주었어. <영혼의 미술관>처럼 영혼을 고양시키는 감동, 전화투표로 보답하고픈 애정을 갖게 하는 책은 아니지만 '우와, 저렇게도 부를 수 있어?' 하고 그 사람과 그 노래를 다시 들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임은 분명한 것 같아.    

 

 줄리언 번스가 첫 장에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 대한 감상을 펼쳐나가는 방법이 독특했어. 보통 그림을 볼 때 그림 속에 나타난 것을 열심히 찾아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내 감정을 정리해보려 하잖아.(아닌가? 나만 그럴 수도) 예를 들면 내가 작품 설명을 해야 한다면 '이 작품에 나타난 대표적인 특징 8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라고 시작했을 거야. 그런데 그는 '제리코가 1차적으로 지양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라고 하며 몇 장에 걸쳐 논거가 탄탄한 논설문처럼 그림에 그려지지 않은 것들을 설명해나가는 거야. 화가의 폐기된 발상들을 상상해보며 작가가 그림에 담으려 했던 것들을 되짚어보는 거지.


『화가가 강 하류를 향해 술술 실려 내려가 햇빛 가득한 저수지라는 완성된 그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조류가 맞부딪치는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잡고 나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p51 / 제리코 : 재난을 미술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머리를 깎고 8개월간 칩거했다는 제리코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존경심을 그가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잡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씩 버려야 했던 메두사호의 사람들도 떠올려보았을 거라 생각하는 건 내가 너무 편을 들어주는 건가 싶기도 하다. 나도 '클루'같이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보드게임 등을 할 때 적극적으로 추리하기보다 가능성을 배제시켜가는 방법을 자주 쓰는데 작품 해석에도 적용해보는 게 신선했어. 보나르를 '구시대 사고방식의 끝'이며 현대 작가'가 아니라고 비판했던 피카소에게 무심히 날린 묵직한 펀치 한 방도 시원스러웠어.


『'자연의 힘을 빼앗는다'는 말은 프로메테우스 같은 느낌을 줘서 짜릿하게 들릴지 몰라도, 미술에서 그것은 마치 영국 전력회사를 지배하는 신들에게서 기껏 라이터 불을 빌리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중략>

예술에서 시간의 즐거운 복수 중 하나는 유파 간의 언쟁을 점점 더 무의미한 일로 만드는 것이다. 보나르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그림은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다. 이 나무는 그의 집 뜰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림에 서명을 하고 얼마 안 되어 곧 보나르의 숨이 끊어졌다. 그의 장례식이 있었던 1947년 1월 23일, 노란색 미모사에 눈이 내렸듯이 분홍빛 밝은 아몬드 나무에도 눈이 내렸다. 자연은 비굴한 노예가 아닌 정열적인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자연은 그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p225 p228 / 보나르: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저평가를 받을 때 속으로는 '저 사람이 질투를 하는군'하고 생각하지만 그 누군가가 꼭 권위 있는 유명인이 아니라도 적극적으로 그를 해명하고 나설 적극성이 내겐 없는 것 같아. '그런 사람 아닌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는 편이야. 보나르가 내게 약간 그런 소심함을 느끼게 하는 작가였는데 줄리언 반스의 편들기에 꼽사리 끼는 쾌감이 있었네. 글 솜씨도 수려하여 머리가 즐겁게 팽글팽글 돌았어. 당장 궁금해서 못 참겠다 정도는 아니라서 다른 작가들 편은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야.     


 수영을 다시 시작하고 며칠 동안 어깨랑 팔, 허리가 아팠어. 힘을 빼고 슬슬하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어느새 있는 힘껏 물 위를 헤엄치고 있더라. 힘주세요, 하는 말은 출산 때 빼고 들어 본 적 없지만 힘 빼세요, 하는 말은 주사를 놓거나 운동을 할 때 등 일상에서 가끔 듣게 되는 말이잖아. 그런데 힘주는 건 어떤 느낌인지 딱  알겠는데 힘 빼는 건 여전히 감이 잘 오지  않아.  하루 동안 읽고 써야지 하고 스스로 정해둔 것들을 다 보류해두었어. 너무 바쁘고 쫓기는 느낌이 드니까 해내는 것에만 의미를 두게 되고 즐기고 음미하는 기쁨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하고 싶은 걸 덧붙이는 건 참 쉬운데 해오던 것을 빼려니 쉽지가 않네. 욕심을 조금만 덜어내도 오전에 이렇게 밥도 먹고 힘도 나고 죽마고우도 만나고 편지도 쓰고. 채워지는 건 더 많은 것 같아. 빼기까지 능숙해져야 곱하기 나누기 더 복잡한 일들도 막힘없이 술술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힘들면 내려놓고 조금 쉬다가 손이 너무 허전하다 싶으면 다시 또 들어 올려보련다. 그렇게 힘줬다 뺐다를 물 흐르듯 자연스레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들고 있었던 게 아까워 내려놓지 못하면 절대 텅 빈 가벼움이 주는 자유로움은 모르겠지. 나는 더하기는 제법 능숙하니까 빼기가 숙달되게 좀 더 신경 써볼래. 마음 근육도 서서히 덜 뭉치고 아픔도 덜 느끼게 단련되겠지? 나 오늘 남궁인처럼 내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지? 편지로는 하기 힘든 실무적인 부분들을 의논하자고 조만간 데이트를 신청해야 할 것 같아. 남은 이야기는 또 만나서 하자. 주말 잘 보내.     


추신. 좋은 구절을 체크해둘 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책에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연필로 메모를 하고 했더라. 요즘엔 바인더 스티커를 이용하는데 오랜만에 옛 책들을 들추어 보니  치열하게 읽은 흔적들이 훈장처럼 보였어. 괜스레 뿌듯하더라. 좋은 책은 두 권씩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넌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인지 아닌지 갑자기 궁금하네. 메모된 책을 서로 바꿔 읽어 보면 또 재밌을 것 같아.     


2021.10월

땡땡이친 거 변명하는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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