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눈물을 왈칵 쏟은 은성에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을 다시 듣고 있어. 왜 얼마 전에 네가 그랬잖아. 위대한 그림이라고 하는데 요리조리 살펴봐도 감흥이 오지 않는 그림이 어느 순간 다가올 때 기쁘다고. 나는 슈베르트가 항상 궁금했는데 쉽게 다가가 지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의 음악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사랑의 기쁨보다 고독 쪽에 천착하는 것이 느껴져. 특유의 쓸쓸함, 그 여운이 좀 오래가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다소 길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만나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 밝고 경쾌한 변주곡 '송어'는 정말 그의 최고 인기작이지만 어쩐지 슈베르트의 대표곡이라 말할 수 없는 것 같았어. 내가 슈베르트 곡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야. 피아노와 함께 하는 첼로 선율이 부드러움과 묵직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해. 마음이 저 우물 밑까지 내려가면 다시 두레박에 얹어 위로 끌어당겨. 25분, 지루하지 않게 집중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 슈베르트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가끔 듣는 곡이야.
며칠 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챕터 23을 읽는 날이었어. 무라이 선생님이 쓰러지시고 후지사와 씨가 처음으로 작업실을 찾아가.
『나한테 거는 전화가 방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앉아서 걸었는지 서서 말했는지, 그것도 몰라요. 만일 슌스케 씨의 의식이 이대로 안 돌아온다면, 이제는 갈 기회도 없잖아요? 작업실 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떤 의자에 앉아서 어떤 경치를 보고 있었는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어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p367』
이 책에서 아름다운 고백 베스트 3을 꼽는다면 '어릴 적의 사카니시 군을 만나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마리코의 고백. '얼굴을 든 선생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라고 마리코의 입을 통해 전해진 선생님의 고백. 그리고 이 장면. 내가 보지 못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이의 일상을 떠올려보는 건 그 사람의 어린 시절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일까? 나도 한 번씩 너는 오늘 어떤 그릇에 정성스레 만든 요리를 담아서 먹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꼭꼭 천천히 음식을 씹는 네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사랑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읽는데 23 챕터가 너무 빨리 끝나는 거야. 너무 아쉬워서 그만 24 챕터를 먼저 읽어버리고 말았다. 격양되지 않고 담담한 조용하기 그지없는 소설이 어떻게 마음을 이리도 가을 낙엽 바람에 휩쓸리듯 쓸어가 버릴 수 있을까 싶었다. 다 떨어진 잎들을 보고 끝이 다가왔음에 슬프지만, 앙상한 가지가 처량하지 않아 겨울이 올 것을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그런 기분이었어. 마리코가 선생님을 위해 연주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죽음을 확신한 슈베르트가 써 내려간 그의 마지막 소나타를 들으며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떨어질까 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앞을 보는 유키코'와 달리 나는 그녀가 선생님께 남긴 음성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쳤어.
첫 주제 선율은 금방이라도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고 '드르르르르' 하며 이어지는 서정성 가득한 멜로디는 너무 아름다워 도저히 작별 인사 같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어. 피아니스트 브렌델이 '눈물도 흘리지 않고 두 눈을 뜬 채 작별을 고하는 듯이 들린다'라고 했다는 20분이 넘는 긴 1악장을 지나 안단테 소스테누토로 연주되는 2악장에 이르니 피아노 선율은 그지없이 무겁게 느려지다 서서히 아르페지오로 밝아지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단단 단단...... 슈베르트의 선율에 몸과 마음을 모두 내맡기자 책은 다시 뒤로 한참이나 물러났어. 생뚱맞게 밝은 3악장 스케르초를 지나 4악장에 이르면 끝내 삶을 긍정하고자 했다는 것을 간절히 되뇌듯 짧고 강렬한 인사를 남기고 끝.
이 소나타 기억해? K 씨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며 우리에게 보내온 리흐테르 연주의 동영상. 그때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처음으로 들었어. 아직 잘 모르는 K 씨만큼이나 이 곡은 낯설었어. 46분이란 긴 연주시간에도 깜짝 놀랐었지. K 씨만큼 매력적일까 기대했지만 내게는 다소 어렵고 지루했어. 두어 번 듣고 다시 듣지 못했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무라이 선생님이 아프고 나서 나는 매 챕터 읽을 때마다 애잔하고 슬프네. 슬픔은 슬픔으로 치유된다는 말을 증명하듯 더 느리고 무겁게 연주되는 리흐테르의 피아노 음들이 이제야 내 귀 속에 들리는 것 같아. 아마 당분간 슈베르트를 만나고 싶으면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가 아니라 이 곡이 먼저 떠오를 테지.
10월의 독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청량한 계절, 가을과 참 잘 어울리는 책이었어. 친구들과 나눈 이 한 권만으로도 10월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고 할 만큼. 정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책은 오래 그곳에 남을 것 같아. 너 역시 '방지턱처럼 속도를 늦추고 눈길을 머물렀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고 평했던 책 (너의 이 감상 표현 너무 멋졌어^^)을 아쉬운 마음으로 마무리 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11월의 독서는 또 어떤 인연으로 다가와줄까 벌써 설렌다. 매일 이 책에 대해 서로의 감상을 나누었지만 음악 말고도 건축, 시간과 죽음, 완고함 등 풀어내고 싶은 수다가 너무나 많다. 아직 백신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은 너에게 너무 말이 많았나? 너는 누구의 연주를 들으며 마리코의 편지를 읽었을까? 리흐테르의 동영상 함께 보낼게. 주말에 각자의 공간에서 함께 있음을 공유하자꾸나. 아마도 시험기간이 쭉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는 말이 무책임해질까 오늘은 삼갈게. 부디 즐거운 주말 보내길.
추신. 난 이 질문이 참 매력적이었어. 내 답은 이미 밝혔고 너는 어느 쪽이야?
『마지막으로 고른 두 대의 피아노 앞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망설이고 있자 선생님이 말했다.
"둘 다 좋네. 한쪽은 긴장되고 씩씩한 맛이 있고, 또 한쪽은 부드럽고 둥근 느낌의 소리가 나."
"같은 피아노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그렇지만 둘 다 소리가 좋은데."
"그렇긴 해. 마리코의 좋은 점만을 두 대가 나눠 갖고 있는 것 같군."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어쩌지?"
"뭐 곤란해할 건 없어. 씩씩한 쪽을 고르면 그 피아노로 둥근 음을 내면 되지. 둥근 음이 나는 피아노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서 좀 더 긴장되게 만들 수 있고."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p373』
사랑을 담아서.
2021. 10. 29 책과 음악의 감동에 흠뻑 취한 승희가.
https://www.youtube.com/watch?v=lncNcNtGk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