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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Nov 10. 2021

15.성취감 하나를 더 수집한 은성에게

호메로스 <일리아스>

 성취감 하나를 더 수집한 은성에게



 며칠 전 너의 편지를 읽고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해 보았어. 한정희의 피아노 소곡<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살고 있다>로 막이 오르던 연극무대가 떠오른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10월에 있을 가을날, 국문과 축제, '문학의 밤' 준비가 시작되었어. 노래패 '모래알 하나로'의 노래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익숙해지고 '마주 보기'의 멤버들의 몸짓 연습이 날이 다르게 춤처럼 변해갔지. 그렇게 과방 앞 복도에 앉아 내려다 보던 이슬 마당이 눈앞에 펼쳐지네. 어느 곳에선가 시 창작 학회 '고갱이'의 시화전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겠지. 극문학 연구회 '짓'은 문학의 밤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창작극의 배우와 스태프를 모집하기 시작했어. 우상처럼 졸졸 따르던 J선배가 총감독을 맡았고 많은 동기들이 참여했지. 처음 맞이하는 대학 축제에 '띠앗머리'를 내 일기장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과방 죽순이인 나도 연극에 한발 담그고 싶어 자진 참가자가 되었어. 이슬 마당에서의 첫 만남 기억나? 배역과 소품, 무대, 음향, 조명 등 담당하고 싶은 분야를 정하기 위해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지. 나는 꼭 음향분야를 맡고 싶어서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떨어져 음향팀에 지원했고 너와 파트너가 되었어.     


 시간이 지나고서야 가치가 제대로 매겨지는 삶의 사건들이 몇 있는 것 같아. 의지가 작용하지 않아 세월이 저절로 그리 만들었다 싶은 그런 일들은 왠지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싶어 지더라. 지금까지 한 명의 동기에 불과했던 네가 나의 삶에 성큼 들어온 순간, 나는 너를 '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지. 너를 인식했을 뿐 '한 송이 장미'로 만들겠다는 특별한 의지 같은 건 없었어. 그래서일까, 함께 했고 그 일을 계기로 친해졌다는 사건의 결과만 남고 폭탄음, 물소리 등은 어떻게 마련했던 걸까, 하는 소소한 기억들은 다 사라졌버렸어. 그래도 대본 공책 마지막 장에 '너희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이라고 J선배가 사선으로 적어 놓은 문장, 901 강의실에서 너와 함께 들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앞부분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어. '누구와 누가 사귀기 시작했대.'라는 남의 연애담에도 '누구는 일은 안 하면서 선배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더라.' 같은  뒷담화에도 귀가 쫑긋해졌지만 까다로운 소품 하나가 마련되었을 때는 큰 일을 한 것처럼 다 함께 웅성거렸고 배우들이 지쳐 눈물을 흘리면 같이 심각해져버리기도 했지.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기쁨을 온몸으로 익히던, 청춘드라마 <광끼>나 <카이스트>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설레던 날들이었다. 그 뒤 국문과 미인(米人) 6인방으로 미모와 우정을 뽐내며 탄탄대로를 걸어왔네.     


 애썼지만 결국 6인방은 해체되고 말았고 애쓰지 않고서도 여전히 우리는 함께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산, 군산, 양산, 부산 전국지도에 점찍듯 떨어져서도 매일 같은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 기적 같기도 해. 운명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걸까. 그건 내가 만들어가는 걸까, 정해져 있는 걸까. 2개월간 <일리아스>를 읽으며 제일 골똘히 생각한 것도 인간의 의지와 숙명에 관한 것이었어. 9월부터 하루에 다섯 장씩 읽기 시작한 <일리아스> 대장정이 오늘 드디어 끝이 났네. 하루도 빠짐없이 빽빽이 하듯 줄거리를 정리해가며 공부하듯 읽어서일까 애착이 남달랐던 학생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든다. 물론 너와 함께 읽는 책들은 다 그렇지만. 근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지 않았어? 고전은 어렵고 지루할 거란 편견을 여지없이 깨어버린 벽돌 책이었어. 지루해서 지칠까 봐 하루 10페이지로 정한 건데 읽다 보니 100m달리기 속도로 읽고 싶어질만큼 흥미진진했어. 역시 벽돌과 편견은 깨부수는 게 제맛이지. <일리아스>를 읽으며 주로 생각했던 것 두 가지만 너에게 두서없이 늘어놓고 싶다.     


『하지만 그때 가장 사랑하는 전우의 죽음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그의 어머니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운명이 나를 따라잡았구나! 하지만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 싶지는 않다.     

<일리아스> P513/ P633』     

 아킬레우스는 신탁의 결과만 믿고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자만하고 있었어. 명예를 얻으면 단명할 것이라는 예언을 피해보려고 누가 와 설득해도 넘어가지 않고 명예 대신 목숨을 고수하잖아. 그렇기에 결국 전세는 불리해지고 사랑하는 전우가 자신의 무구를 입고 전쟁터에 나가 죽고 말아. 그 때서야 마음을 바꾸고 친구의 복수를 결심하고 스스로 전쟁터로 나가지. 운명을 미리 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어갈지, 그 과정까지 알 수는 없었던 거야. 신들의 말이 아무리 강력해도(아카이오이족이 승리하리라는 정해진 운명은 그대로 실현되었지만) 그 과정은 승리라 할 수 없는 상실을 안겨다 주고야 말았어. 상실하고 나서야 운명을 제대로 받아들인 아킬레우스가 운명 앞에 서서(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의지로써 당당히 전쟁터로 나아가리라 결심하는 장면은 참 압권이었어. 나 역시 인간이기에 제우스나 신들이 (운명) 인간의 목숨을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이 억울해 대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거든.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는 시종 운명에 쫓기는 인간이었지만, 비극 속의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성찰하는 사람이 된다. 그에게 운명은 신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수사에 따라 재조직된다. 그는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지려는 상황에서도 수사를 고집하고, 진상이 밝혀진 이후에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그의 이 의지는 신탁에 없던 것이며, 그가 제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도 이 짧은 순간이다. 그는 패배하면서도, 운명의 농간에 덧붙이는 이 작은 행위에 의해 거대한 운명의 폭력에 의해 인간의 위엄을 세우고 마침내 운명 앞에 선 인간의 패배를 인간의 위엄으로 바꾼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p116』     


 얼마 전에 <오이디푸스>에 대한 참신한 해석이라고 읽고 넘겼던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이 떠올랐고 책을 펼쳐 다시 정독을 했어.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야 말로 운명의 농간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세우는 일이라니, 정말 '유레카'란 이럴 때 외치는 게 아닐까 싶게 기쁘더라고.     

 은성아 너는 <일리아스>의 많은 장면들 중 제일 인상적인 단 하나를 꼽으라 하면 어디야?  나는 장례 치르는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더라. 시신을 씻기고 화장할 동안 전쟁을 쉬겠다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부분,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 경기'에서 장례의 마지막에 상품을 내걸며 올림픽 경기 같은 축제를 벌이는 장면 등. 영웅들이 더 좋은 상품을 차지하려고 꾀도 내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내용인 23장은 깨알같이 소소한 재미를 주는 챕터였어. 어느새 죽음은 잊히고 즐겁게 경기를 관람하는 내가 있더라고. 애도의 마무리가 꼭 슬픔일 필요는 없겠구나 싶었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장치가 사람에겐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     

 뜬금없이 장자의 죽음에도 생각이 머물더라. 장자가 자신이 죽으면 '태양과 대지가 나의 관이다' 라며 자신의 시신을 들판에 버려두라 하자 제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싶어 버티잖아. 그때 장자가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거늘 어찌 한쪽 것을 빼앗아 딴 쪽에다 주어 한쪽 편만 들려하는가?(<장자>-오강남 역주 P 415)"라고 해. 이 부분 처음 읽을 때 참 멋졌어. 지금도 그렇긴 해. 그 말이 진실인 것도 충분히 알고. 잘 될진 모르겠지만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 하고 겸허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읽고 쓰는 거라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관대하기 힘들 것 같아. 겸허히 받아들이지 말고 좀 더 살아주었으면 하고 기도하게 될 것 같아. 나의 시신은 아무래도 좋지만 사랑하는 이는 제대로 추모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도인이 아닌 인간의 사랑인 것 같아. 내 죽음엔 장자처럼 타인의 죽음엔 제자처럼, 뭐 그런 다짐을 한 번 해보게 되었어.     


 올해 4.16 티브이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면을 봤는데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다 호명해주더라. 가족에겐 한 명 한 명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개별적 존재잖아. 그러나 전쟁이나 사고로 많은 목숨이 한꺼번에 희생되면 죽음마저도 고유하게 추모받지 못하고 하나의 사건으로만 대중에게 기억되고 만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어. 미미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을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되새기며 나도 <일리아스>를 읽으며 싸움터에서 쓰러져가는 이들의 이름만은 꼭 빠지지 말고 남겨두어야겠다 싶더라. 호메로스라는 작가가 굉장히 인간적이라고 느꼈던 것도 결과적으로 패하고만 트로이아인들의 이름과 내력을 조금 더 자세히 남겨두려고 했다는 점, 그것이 작가를 신뢰하게 만들었어.     


 이제 <일리아스>를 마무리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만나자. 나는 전에 듣던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를 다시 꺼내 듣기 시작했어. 이번에야 말로 완독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른다. 가을산도 활활 불타오르는데 코로나 시국의 대학생들은 젊음을 어디서 불태우고 있을까. 대학축제도 중단되어 버린 건 아닐까.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함께 웃고 울었던 선배들과 동기들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이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다 모래알 알갱이처럼 다들 흩어져버렸어. 어딘가에서 우리들처럼 함께 책도 읽고 시시콜콜 일상 이야기도 나누며 살아가고 있을까.  

   

 얼마 전엔 H선배가 출근길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문득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물어오셨네. 대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카세트 테이프를 제법 들었잖아. 지인들에게 녹음한 테이프를 가끔 선물하곤 했었어. 여행스케치나 동물원 노래를 들으면 내가 생각난다고 하는 지인들이 좀 있더라. 그래도 졸업 후 결혼식장에서 말고 만나 적이 없었기에 느닷없는 그 안부가 더 반가웠어. 나 역시 현아의 진로 상담을 하러 J 선배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어. '어우~~승희야~~~' 하고 반기는 첫인사.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목소리, 말투 다 그대로더라. 흙 속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다가 느닷없는 곡괭이질에 잊고 있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었어. 여전히 관계에 서툴러 학부모가 방문하면 구석으로 숨고 아쉬운 소리 하느니 손해보고 말지 하며 사람들과 거리를 둘 때가 많지만 나도 누군가가 뿌린 씨앗, 이왕이면 풍년이라 느끼게 할 알곡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불끈 솟아나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래 결국엔 애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건 없나 봐. 수많은 장미꽃에 불과했던 네가 '한 송이 장미'가 되기까지 2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 역시 여우처럼 너에게 길들여져 갔기에 너의 인사가 늦는 날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사랑할수록 서로의 눈이나 말, 안부나 미래에 대해 더 섬세하게 반응하게 되고 참견도 늘어나고. 절로 절로 우정이 쌓여왔다 생각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이 편지를 쓰면서야 문득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번뜻 밝아지는 게 있네. '운명'이란 단답형 명사가 아니라 '명(주어진 것)'을 '운(운행한다)'는 서술형 동사였어. 이 모든 게 신들의 배려였다 하더라도 결국 너와 내가 결정해서 만들어가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분명해. 애쓰지 않는 사이는 남남일 뿐이야. 몇몇 사람에게는 더 애(愛) 쓰며 살고 싶다.     


추신 1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라는 편지글을 엮은 책이 11월에 나왔다는 것을 보고 조금 충격이었다. 우리가 늦었으니 우리가 아류잖아. 이번 주 만나서 제목을 바꿔보기로 했는데 문득 편지를 다시 읽다가 '띠앗머리 - 형제자매 사이의 우정'는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할머니 같나? 아, 모르겠다. 좋은 제목 뭐 없을까? 의논해야 할 것들이 많은 만남이 될 것 같아 더 설렌다.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2021. 11.10

<일리아스의 대장정>을 마치고 기쁜 승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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