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잘런 <랩걸-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명(命)을 운(運)해보려는 은성에게
함께 했던 대학시절이 '인생의 방학'이었다는 너의 말이 참 좋더라. 너의 방학 속에 내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함께 했다는 것도 영광스러웠어. 그리고 너를 만나 실컷 수다를 떨고 돌아온 토요일 밤, 옛 편지들을 꺼내 읽어 보았어. 다섯 친구가 대학생 시절에 써 준 편지는 봉투를 없애고 바인더 구멍을 뚫어 작품집처럼 책장에 보관하고 있거든. 언젠가 이사할 때 이름과 얼굴이 함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내 소프트웨어가 지지직 거리는 사람의 편지들을 그때 한번 다 정리해버렸어. 너희들에게 받은 것은 한 번씩 쉽게 꺼내보고 싶은 마음에 만든 건데, 사실 잘 봐지지는 않더라. 이 편지 묶음의 양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넉넉할 분량이야. 너의 편지를 읽고 다른 친구들 편지도 읽어보려 했으나 양이 많아서 그만 지쳐버렸어! 이 시절이 서로에게 편지를 제일 많이 주고받았던 시기임에 틀림없어. 따로 모아둔 졸업 후의 편지들은 시간과 반비례 곡선을 그리더라. 1/5의 분량도 채 되지 않더라고. '인생의 방학'임에 틀림없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청춘은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늘 존재하는 것일까? 유머러스한 너의 글 곳곳에도 미래를 대비하느라 불안한 청년이 자주 등장해.
너의 편지를 읽고 있으니 우리가 지금 함께 읽고 있는 책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의 저자인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이 떠오르더라. 마침 호프 자런이 불안한 청춘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부분을 읽고 있잖아. 세상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성공하기 위해 생존의 위협까지 감내해가는 두 청년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하고 반성하게 되더라.
『씨앗은 번성하기를 기다리지만 나무는 죽기를 기다린다.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자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드물다. 발자국 하나마다 수백 개의 씨앗이 살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 P52』
나 역시 큰 나무들만 보았지 발밑 씨앗들을 살펴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 성공한 삶의 성공만 보이고 기다림이나 노력은 잘 보이지 않았듯이. 시련으로 가득한 성공 (단지 자기 이름을 내건 랩실을 갖는다는 소망을 이루는 것)이기에 그들의 삶이 더 빛나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시련 빼고 성취만을 원하며 투정 부리기 일쑤였단 생각이 들었어.
지금 우리 집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청춘이 한 명 있지. 재수 준비를 시작하기 전에 책에서라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한 두 달 쉬면서 독서에 열중해보자고 제안했다. 현아에게 권할 책 목록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 책도 서슴없이 목록에 넣었어. 유시민이 한 프로그램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책'으로 추천했다고 하기에 그가 한 말도 찾아보았어. "'아,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하고 공부하는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안심이 되더라고요. 아직 걱정할 만한 일들이 보이지만, 이렇게 과학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니 우리 딸도 잘 해낼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을 느꼈어요.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라고 하시더라고.
불안이 청춘의 전유물은 아닌가봐. 나 역시 지금도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때가 많아. 먹고 자고 입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다가도 이 주춧돌이 흔들리는 게 감지되면 생각은 본능적으로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지'라는 말을 곱씹으며 방어태세로 돌입하더라고. 그 말을 보호막 삼아 '꿈'은 사치가 아닐까 하며 뒤로 밀어버리고 말이야. 돈 버는 일도 잘 해내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짬짬이 쓸 수 있는 몸과 정신의 내공이 절실히 필요해. 끓어오르는 열정은 지금껏 모아 온 장작더미들로 인해 청춘일 때보다 불이 더 잘 붙어 타오르는 것 같은데 시간적 여유와 체력이 그 불의 화력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 같아. '일이 적으면 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어 좋고 일이 많으면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어 좋다.'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나는 일이 많으면 힘들고 일이 없으면 걱정이 움트고. 그러고 살고 있어.
너는 운명의 장난도 유유히 받아낼 맷집이 생긴 게 분명해 보여 정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어. 제우스가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자연스레 몸을 내맡겨 볼 여유가 생겼다니 말이야. '제우스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구나.' 하는 너의 말에 내 심장이 먼저 콩닥콩닥 거리더라. 새롭게 걸어갈 너의 길, 네가 공들여 다듬어갈 그 길에 나무가 쑥쑥 자라나고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길 기도할게. 우리의 <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읽기도 이제 3부 '꽃과 열매' 부분으로 진입했어. 이제 조금씩 열매를 맺어가는 부분이 기다리고 있겠지? 아이를 낳고 고군분투할 그녀, 나무들처럼 슬기롭게 그 위기들을 지나갈 그녀의 모습이 기대된다. 벌써 내 마음은 위로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 너와 내가 제우스 데려가는 곳이 어디든 기꺼이 따라나설 용기가 생기도록 응원의 문구를 하나 남기며 오늘은 이만 총총.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 지붕에는 이엉을 덮어 놓았고, 집 안에는 불을 지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도 벗어 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에는 아무것도 걸쳐 놓지 않았고, 탐욕의 불은 남김없이 꺼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숫타니파타> '소치는 사람‘ 중 -법정 옮김』
추신1.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선언하고 싶은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못했어. 사랑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놓을게. 사랑에 서툰 나를 위해 조언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가득 하니 남은 이야기는 또 만나서 하자.
추신 2. 혹시 현아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몇 권 추천해주겠어?
2021.11.23.
소치는 다니야라도 되고 싶은 어리석은 승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