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매번 어려운 숙제를 잘 해내는 우등생 은성에게
사랑하는 친구 은성에게.
너의 숙제장 잘 받았어. 네가 써낸 리포트는 A+ 점수를 주고도 부족함이 없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고 진심이 느껴져서 울컥하고야 말았지. 네가 권한 글쓰기도 현아가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주고 네 편지에 감사함과 공감을 표하는 걸 보고 네가 나의 친구라는 것에 어깨가 으쓱해졌어. 긍정적이고 현명한 나의 길동무, 너에게 숙제를 좀 떠넘겨서 내 숙제가 수월하게 끝났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를 권하는 건 욕심이라는 말에 현아랑 둘이서 박장대소했다. 전에 내가 권한 그 책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고 이번에 털어놓더라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에 '그분들은 어른이 되면 결국 좋아하게 될 작품들을 아이들 앞에 미리 놓아두면 아이들이 처음에는 그냥 좋아하다가 저절로 안목이 길러진다고 생각하셨다. 아마도 미적 가치란 것이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쉽게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그러한 가치가 서서히 성숙하기를 기다릴 필요성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p258)'에서 그 '어른'이 바로 나였어.
얼마 전 옛날 편지를 뒤지다가 4년간의 대학성적이 한 장에 담겨있는 성적표를 발견했어. 내가 이렇게나 공부를 못했나? 정말 너희들의 도움 없이 혼자 수업을 듣던 4학년 성적표는 B와 C로 도배를 했더라. 그래도 너희가 대출도 해주고 했을 때는 A가 드문 드문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처럼 즐겁게, 시간 가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환희에 차서 읽고 쓰기를 했다면 우리의 젊은 날은 얼마나 더 풍성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더라. 하지만 고등학교 때 읽은 <데미안>과 마흔이 넘어 다시 읽은 <데미안>은 전혀 다른 소설이었듯이 세월을 통과해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겠지. 젊은 천재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좋아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참 귀한 경험인 것 같아. 지금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20년 전에 읽었다면 이 정도로 좋아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도 <밤의 피크닉>과 기타 교본 등을 골라주고 다른 책들은 스스로 고르라고 했어. 골라 온 책이 내 기준에 미흡하고 아쉬웠지만 '이런 건 도서관에서 빌려봐도 충분해'라고 잔소리하지 않았다. 잘했지? 현아가 중3 때부터는 말수도 줄고 기운도 없고 고민이 많고 해서 '이제 철이 들어 그런가, 성격이 많이 바뀌네' 싶었거든.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자 다시 어렸을 때 보이던 밝은 미소와 활기를 되찾았어. 정말 다 공부 스트레스와 중압감 때문이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짠했다. '이모, 내가 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 하며 아쉬워하더니 며칠 전엔 용돈을 털어 기타를 사 왔더라. 주말 산책도 따라나서고, 카페에 앉아 여행 계획도 세우고. 그것만으로도 미래에 대한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 유예기간이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고 둘이서 서점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감사히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나 오늘은 며칠 전 비 오는 날 아침에 느꼈던 어떤 기쁨에 대해 너에게 털어놓고 싶어. 마르셀이 세 개의 종탑에서 느꼈던 그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의사에게 연필과 종이를 빌려 마차가 흔들리는데도 의자 구석에 앉아 글을 쓰잖아. 그리고 이렇게 말해. '이 글을 다 썼을 때 나는 너무도 행복해서, 이 글이 나를 종탑과 종탑 이면에 숨겨진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해 준 것 같아, 마치 나 자신이 암탉이 되어 이제 막 알을 낳기라도 한 것처럼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P312)' 라고. 나도 뭔가 그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가 봐. 수업을 마친 후 너에게 꼭 이 기분을 전해야겠다 생각하고 휘리릭 쓰고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었어. 프루스트처럼 쓰고 고치지 않고 넣어둔 건 아니고, 다시 심혈을 기울여 고쳐 쓴 거야.
비 오는 아침, 뱀이 S자를 그리며 유유히 기어가듯 굽은 소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을 달리는 것처럼 사람을 차분하게 하는 게 있을까? 부처님 말씀을 들으러 일주일에 고작 한 번 산에 오르는 그 길이 잠시 속세를 떠나 피안으로 가는 길이라 한다면 너무 호들갑스러울까? 짧게만 느껴지는 소나무 숲을 지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초록으로 우거진 평소의 전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개가 절 마당을 가득 뒤덮고 있더라. 아, 이토록 낯선 이곳은 어디일까? 안개에도 냄새가 있을까 코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들이켜 보았어. 그러나 그것도 찰나일 뿐, 어찌나 비님이 기세 좋게 내리시는지, 웅덩이를 피해 가며 참새처럼 종종거리며 교실로 들어왔어.
자리에 앉으니 열린 뒷문으로 처마에서 비가 듣고 마당의 빗물이 얕은 윤슬처럼 밀려왔다 쓸려가는 모습이 보이더라. 회색빛 안개가 숲의 나무들을 숨겨주고 있는 가운데 단장한 소나무 한 그루가 정면 끝에서 의연히 비를 맞고 있었어. 매주 앉던 내 자리에서 늘 보이던 풍경이었을 뿐인데 오늘은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눈 속의 떡갈나무>가 오직 나만을 위해 전시되고 있는 것만 같았어. 뒷문이란 액자에 걸어둔 자연이란 예술 작품을 독차지하고 앉아서 법문을 들었다. 모인 비가 처마에 잠깐 고였다 한 번에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는 참았던 오줌이 터져 나올 때처럼 몸도 마음처럼 경쾌하게 하는 질리지 않는 소나타였어.
누구나 알고 있는 대상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을 때보다 더 힘든 일인 것 같아. 어쩌면 익숙해져 버린 법당 앞 풍경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아마 비와 안개가 주는 묘한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90%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책 덕분이겠지.
『뭔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나더니, 다음에는 위쪽 창문에서 모래 알갱이를 뿌리듯 가볍고 넓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 소리가 퍼지고 고르게 되고 리듬을 타고 액체가 되고 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보편적인 음악이 되었다. 비였다.
그리고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탕송빌의 하얀 울타리 위에는 내일이면 수없이 많은 작은 하트 모양 잎들이 물결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페르샹 거리의 포퓰러 나무가 소나기에 절망적으로 간청하고 인사하는 것을 보아도, 또 정원 구석에 있는 라일락 나무 사이로 마지막 천둥이 무섭게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슬퍼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민음사 / P182, P267』
며칠 전 비를 묘사한 이 부분이 나를 들었다 놨다 했거든. 오묘한 심리 묘사나 심오한 철학을 담은 것이 아니라서 더 그랬어. 비를 '보편적인 음악'으로 표현하다니. 어렵지 않으면서도 공감이 되는 신조어를 만들고 익숙한 대상에 나만의 별칭을 부여하는 행위. 우리는 그런 사람을 시인이라 그러겠지. 나도 이번 편지는 프루스트식으로 한 번 써보고 싶었나 봐.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내 속에서 죽어버렸던 사물들에 대한 감각을 한껏 느끼며 살고 싶다. 마르셀이 느끼는 그 강렬한 기쁨,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는(p86)' 그런 기쁨을 발견하고 싶었어. 예쁜 찻잔을 마련하여 홍차를 즐기는 기쁨을 삶에 추가하는 너의 자세를 닮고 싶기도 했고 말이야. 책 한 권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지 못해도 한 순간의 전율은 몸에든 무의식에든 깊이 각인이 되겠지. 잘 산다는 건 떨리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가는 과정, 훗날 마르셀의 마들렌처럼 입 안 가득 피어날 꽃향기로 되돌아올, 기쁨의 씨앗을 심는 일일지도 모르겠어.
감각을 깨워주고 매일 내 마음을 대신 고해성사하듯 고백하며 심리전을 펼치시는 그분 덕에 독서가 즐겁긴 하지만 매 순간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은 피곤하기도 해. 1권에서 되살린 기억들은 황홀한 순간들에 대한 회상이었어. 그 환희 속에서 나도 덩달아 독서의 단물을 배부르게 쪽쪽 빨아먹었지. 그러나 2권 '스완의 사랑'편으로 넘어가며 사랑의 빛과 그림자,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병 질투, 시트콤같이 우스꽝스럽고 적나라한 사교모임.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심리까지 다 꿰뚫어야 쓰일 글들. 이 귀한 것들을 아껴읽고 있지만 왠지 프루스트가 안타깝기도 하다. 아, 정말 피곤했겠다 싶어 지더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해석해내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것들이 느껴지는 삶, 어떨 것 같아? 얼마나 황홀하고 힘들었을까. 감수성을 타고난다는 건 축복일까, 형벌일까?
"몸은 젖어도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비는 비가 아니라 그 이름이 비일 뿐이다, 그러니 비에 집착하지 마라. 소리에도 속지 말고 모양에도 걸리지 말라."
부처님이 나의 오른쪽 귀에 대고 말씀하신다.
"몸은 젖지 않아도 마음은 물든다. 시인은 누구나 아는 단어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다. 눈, 코, 귀를 활짝 열고 온몸으로 느끼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
마르셀 프루스트가 나의 왼쪽 귀에 대고 유혹한다.
그렇게 피안과 차안을 왔다 갔다 하며 세 시간을 보내다 다시 한참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왔어. 산 밑은 서서히 비가 그쳐 가고 늘어선 은행나무들이 지천으로 사방 세계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어. 비가 아무리 세차게 내려며 가을의 마지막 인사를 재촉한다 해도 슬플 것 같지 않은 순간이었다.
액자 형식의 편지가 되어 버렸네. 있잖아, '매번 어려운 숙제' 라는 거 말이야, 그걸 받아 든 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더라. 너의 '흰쌀밥과 깻잎'과 같이 '유년의 따뜻했던, 내 속을 단단하게 채우는, 유년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서 내게 전달되는' 음식이 무엇일까 '즐겁게 고뇌'해 보았어. 어렸을 때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참 좋았어. '오늘은 집에 무슨 간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느려 터진 굼벵이 같던 내 발걸음도 다소 빨라졌어. 어릴 때 살던 집이 3층이었는데 그때는 대문을 열어두고 생활했었던가, 우리 동 입구에 들어서면 도넛을 튀긴 기름 내음이나 카스텔라가 굽히는 냄새가 아스라이 나는 거야. 혹시 우리 집일까 하는 기대를 안고 꽤나 많다고 여겨지던 계단을 오르면 기대가 확신으로 번져가는 거야. "엄마 오늘 간식 뭐야?" 하며 가방을 휙 내던질 때의 그 만족감. 아 오늘도 무사히 감옥(나는 초등학교 때 학교를 무지 싫어했어)에서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안도하던 그 순간의 느낌이 떠올라. 그때는 맛도 참 좋았는데 어른이 되고 엄마가 만드신 카스텔라나 도넛을 먹어보니 그때 열광했던 그 맛은 아니더라고. 분명 안도의 설탕가루가 환상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 놓았던 걸 거야. 너의 숙제 덕에 즐거운 시간 여행하였다. 매번 어려운 숙제를 잘 해내는 너이니, 이번엔 숙제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줄게. 숙제 없는 주말 잘 보내고 다음 편지로 만나자.
추신. 너 역시 매일 매일 노력하고 있잖아. 함께 읽고 의미 있는 한 문장을 골라 느낌을 적는 것. 그 쓰기 시간을 너의 글쓰기 연습시간으로도 만들어가고 있구나 생각했어. 맞지?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완성된 한 단락을 읽는 것 같은 정제된 너의 감상문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완전 구구절절 일기 같아서 말이야.
2021. 12.04
A+ 숙제장을 써 준 것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며, 승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