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시작되는 게 인생이라지만

生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장미의 영혼

by 조승희

떡국 한 그릇 깨끗하게 비우면 나이 한 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나이는 몇 살까지 일까? 나는 후회를 모아 상자 안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2022년도 희망 목록을 짜느라 분주했다. 그 옆에서 얼른 아홉 살이 되고 싶은 아이는 떡국을 재촉한다. 아이는 어린 만큼 순수하고 명랑하다. '나이 먹음의 회한' 이라는 양념을 뿌려 떡국 맛을 오묘하게 만들어버리는 나와 달리 떡국 한 그릇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자다. 온실에서 기르던 모종을 밖에 옮겨 심어야 할 때가 올 텐데, 혼자 잘 이겨낼 수 있을지. 어려움 모르고 밝게 자라는 아이가 사랑스럽지만 떡국을 먹은 횃수만큼 '생(生)'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아는 소심한 부모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미리 앞당겨 한다. 먼 날의 된서리를 걱정하는 초보 농부처럼.


아이는 출산과정에서 태변을 흡입하여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가 회복되었다.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고 축하인사를 받은 엄마 옆에 아이를 데려와 보여주면 감격한 산모는 출산의 고통 따위 10년 전 일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순간이 내게는 없었다. 전형적인 출산 장면만을 상상했던 나는 본능적으로 공포감에 휩싸였다. 엉덩이를 토닥여도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지 않자 당황한 의료진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찰나의 시간, 그러나 결코 우리를 위해 멈추어주지 않을 매정한 시간을 느끼며,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생의 환희를 맛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살아나게만 해 달라고 허공에 대고 간절한 마음을 두 손에 모았던가. 무상하기에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존재를 본능적으로 갈망하고 있었다.


결국 늙고 아파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왜 태어나는 것일까? 이 회의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싯다르타 역시 젊은 나이에 세속에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친 오랜 수행 끝에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울면서 태어나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지만 생이 그 자체로 고통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흰색 도화지 위에 간간히 괴로움의 점이 찍히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세상이 아예 검은 도화지라니. 어쩌다 색색깔 환희의 물감들을 잘 보이지도 않게 덧칠하며 살고 있다니. 부처님 너무 비관주의자 아닌가? 그러나 나처럼 절망하는 중생이 가여웠던 걸까. 고통은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일 뿐이니 그 무명을 밝힐 지혜만 터득하면 된다고 슬그머니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채워지지 않을 곳간을 채우느라 힘 빼지 말고 다음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게 이번 생에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라고 등을 떠민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쉬지 말고 정진하라고 다그친다.

붉은 담벼락 넝쿨에 분홍 장미 몇 송이가 만개했다. 한 여인이 살포시 눈을 감고 키스를 한다. 연인과 하나가 되고 싶은 걸까. 얼굴은 꽃잎같이 발그레하고 몸은 잎사귀가 되어 초록으로 물들었다. 그리운 마음을 손끝에 담은 듯 벽에 살짝 기대고 섰다. 더 가까이 가려고 꽃송이를 조심스레 오므려 잡은 손은 가녀리고 풍성히 묶인 갈색 머리는 탐스럽다. 마치 처음으로 꽃을 본 것처럼 몰두해 있는 여인의 모습은 장미만큼이나 아름답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후기 작품 ‘장미의 영혼(The Soul of the Rose, 1908)’이다. 풍성하게 핀 붉은 장미 대신 만개하지 않은 꽃봉오리들은 농부의 무심함일까, 화가의 섬세함일까. 소박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이 낭만적인 한 점의 그림에는 생의 충만함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달콤한 키스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듯 그림에서 쉬이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살아있어 다행이야, 너를 보고 너를 만지고 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 감탄스러워. 너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환희로울 수 있기에 감사해.’ 그렇게 여인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그림 속 여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닳지도 않을 견고한 보석 박힌 왕관이 아닌 한 철 피었다 지고 마는 주인 없는 꽃 한 송이에 매료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긴 기다림 끝에 만난 꽃이 곧 져버릴 것을 알기에 더 간절해진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검은 도화지 위에 그려지는 새 하얀 점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오듯 고통은 생의 불길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된다. 꽃이 져도 슬픔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당 한 구석 조각 햇볕도 사철 푸른 나무나 우렁찬 파도소리도 누리려고만 한다면 값을 치르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 장미를 대신해 그녀를 위로할 것이다.

프랑스의 한 산부인과 의사는 신생아의 울음이 조명과 출산과정에서의 소리, 분주한 분위기 등에 대한 고통의 표현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울음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하고 싶다. 생(고통의 강을 건너야 할 의무)을 선택한 이상 그 강을 무사히 건널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새해를 맞아 ‘장미의 영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분홍 장미는 감사, 감탄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통의 사바세계를 안전하게 건너는 징검다리는 감사와 감탄이라는 꽃잎으로 이어져있는 건 아닐까. 언제 시들지 모르는 꽃 앞에서 한탄하기보다 감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일은 태어남을 축복하고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지만 일 년에 한 번만 있는 날은 아니다.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생일(生日)이다. 새해엔 365일이 생의 나날들이기를. 울면서 시작된 인생길이 꽃길을 내어가는 과정이기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