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와 산책>
편지를 기다리다 눈이랑 목이랑 다 빠지는 줄 알았어. 실은 31일 날 보낼 거라 짐작했었어. 예상이 맞았네. 마감 원고를 기대하는 편집자 같은 마음이었어. 마감일을 딱딱 맞추어 주는 게 신기하고 고맙고 그랬다. 그런데 오래 사귀어 알건 다 안다고 생각해오던 연인이 어느 날 느닷없이 꽃을 내밀 때, 반가우면서도 무슨 일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긴장하게 되는 때가 있잖아, 며칠 전 바로 그랬네. 마감일이 되기도 훨씬 전에 보내온 너의 글에 깜짝 놀랐어. 청소를 '하루를 시작하는 10분을 그 하루 전체의 예고편'으로 삼고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하겠다는 다짐이 담긴 너의 글이 꽃향기처럼 반가웠어. 나도 종업원이 잠깐 쉬는 꼴을 못 보고 일을 시켜대는 사장님처럼 얄궂은 데가 있나 봐. 1월에 조금 여유를 즐기는가 싶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여러 일들을 저질렀어. 덕분에 다시 주말이 아니면 매일 한 시간도 쉴 틈이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마감일보다 너무 앞서 글을 보내는 내가 아마 이번엔 마감일에 임박하여 발행 버튼을 누르게 되지 않을까 싶어.
너의 말처럼 새해 들어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니 1월은 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날들이었어.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흘렀어. 처음 글 쓸 때는 막 떨리고 한 편을 쓰고 나면 홀가분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뭔가 세상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랬는데 말이야. 벌써 100편의 글이 모였더라.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일인지 몰라도 통장잔고 불어나는 걸 보듯 든든했어. 그러는 동안 글쓰기에 대한 애정도에도 변화가 좀 생긴 것 같아. 글을 쓴다는 게 외국여행 온 것 같은 낯선 기분도 제법 사라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세수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어. 전에는 꼭 안 써도 읽는 사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살짝 한 발을 빼고 있었는데 글쓰기와 이제 평생 헤어지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어.
여우가 1년간 나를 길들인 결과인 걸까. 네 말대로 평생의 친구를 찾은 것 같아. 그런데 알아갈 시간도 우정을 나눌 시간도 아직 많이도 남았는데 얼른 그 친구에게 인정이라도 받고 싶은 조급함이 생기더라. 세간에 정식 작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불끈 솟더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쓴 것을 책으로 엮기 위해 출판사에 투고를 한다는 것이 귀찮게 여겨지기도 했는데. 평소에 남에게도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스스로에게도 독자에게도 떳떳한 글들을 쓰자고 다짐하곤 했는데. 갑자기 책이란 게 요즘은 삶의 진실을 나만의 문장으로 치열하게 빚어낸 장인의 도자기가 아니라 삶의 이벤트 정도로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더라. 나도 갑자기 책을 내고 싶다는 욕망이 앞서서 너에게 조금 칭얼거렸잖아. 뭔가 책 한 권 없는 내가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러워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고 싶다고. 자가출판이라도 할까 하고. 그렇게 조급한 마음이 들면 뭐라도 해야 하는 성격이라 출판사 이메일 찾아 정리하고 투고해 볼 원고들을 타이핑하며 며칠 들떴어.
그런데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를 읽고 글을 어느 정도의 성실함으로 대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를 얻었어. 네가 릴케의 편지에서 '당신의 삶은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실 나는 정말 자투리 시간 활용의 일인자라 자부하기도 할 정도로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을 보낼 줄 모르는 게 오히려 문제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거든. 나 스스로 열심히 산다고... 내 딴에는 최선이라고. 그런데 이것저것 하느라 실속 없이 바빴지 글 한 편에 완벽하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
정여울 작가는 글을 한 편 쓰기 위해 영화를 다섯 번 이상, 대사를 외울 때까지 보고 여행 가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글을 쓰고, 서평 하나를 쓰기 위해 세 번 정도 읽고 매력적인 부분을 타이핑한다고 하더라고. <천 개의 고원> A4 서평 1장 분량을 쓰기 위해 한 일들을 소개하는 부분이었어. 아무리 어려워도 한 문장도 빠짐없이 자세히 읽는다, A4 10매짜리 필사 노트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펼친 브레인스토밍의 기록을 합쳐 A4 20장짜리 노트를 만든다, 그 노트를 가지고 씨름한다, 자꾸자꾸 줄여간다. '이렇게 해야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나만의 느낌을 정리할 수 있고, 서평 쓰는 사람이 저자를 향해 지켜야 할 예의를 다할 수 있다고 느꼈져요(p157~p158)'. 정말 끊임없이 읽고 보고 메모하고, 쓰고 고치고 그러는 모습에서 치열하게 읽고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내가 이 정도면 되었지 하고 안주했던 수준이 얼마나 낮았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더라. 우리도 <천 개의 고원> 읽을 때 함께 고생했지만 이렇게 하지 못했잖아.
한 달간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짧은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거 알지? 얼마 전 현아 졸업식에 배달된 글감이 '돌멩이'였어. 무엇을 쓸까 고민하는데 묻어 둔 옛 일들이 떠오르더라. 한 번도 글로 쓴 적도 자세히 이야기해 본 적도 없는 아픈 이야기. 쓰면서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혼자 펑펑 울고 말았어. 남에게 보여야 하는 글을 솔직하게 풀어서 써 본 적이 처음이더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임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 술 한 잔 같이 하고 진실게임에 돌입했을 때 같은 그런 기분. 이 때는 뭐든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은 몽롱한 분위기 같은 거. 같이 글 쓰는 사람들의 용기에 나도 불끈 용기가 솟았을 수도 있겠고. 하여튼 펑펑 울면서 글을 한 편 썼어.
그날 이후로 말로만 듣던 글쓰기의 치유효과, 글쓰기의 진정한 즐거움과 효용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더라. 목적 없이 단순하게 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은 대로 쓰던 글들, 일기가 최고의 반성문이고 미래를 향한 출사표였어. 편지 한 장이 우정의 다짐이며 사랑의 세레나데였어. 그 글쓰기는 이것 저것 재지 않고 완벽히 즐기기만 한 유희였더라구. 출간 작가가 된다거나 쓴 글들이 효용이 있기를 바라며 문장을 꾸미고 얼개를 짜가며 쓰는 글도 좋지만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하는 글쓰기가 있었다는 걸 오랜만에 떠올리는 시간이었어.
참, 첫 책이 이 정도면 어디 내놓아도 떳떳하겠다 싶을 책 한 권을 소개받았어. 2020년도에 첫 발행된 한정원의 <시와 산책>. 작년에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나 봐. '시간의 흐름', 이름도 예쁜, 출판사에서 펴 낸 책이야. 깊이 있는 사유를 품은 시처럼 은유적이고 간결한 산문집이었어. 고요하고 아름답다는 말 외에 다른 수식어도 붙이기 힘들 정도여서 도대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일더라. 작가 소개란을 펼치니 일반적인 약력 소개는 생략되어 있어.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연기를 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인들의 발자국만이 남기를 바란다, 앞으로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가고 싶다.' 같은 인사말로 대신했더라고.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이란 글을 써서 유일하게 두 번의 공쿠르 상 수상자로 기록되었지.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며 첫 책일 리가 없다, 본명을 감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상상을 진지하게 해 보았네. 어쩌면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원래 글쓰기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발전의 단계를 거치잖아. 이렇게 멋진 글들이 어디서 뚝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 탐정이 되어 돋보기를 꺼내 들고 흔적을 뒤졌으나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어. 베일에 가려져 있어 더 알고 싶어지기도 하고 이 신비로움을 영원히 지속시켜 주기를 기대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내공, 그럼에도 자신을 강렬히 각인시킬 수 있는 문장. 이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걸 까.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명예적 욕망을 벗어버린, 글쓰기가 그냥 오롯이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어. 모방이 어려운 사유와 문장에, 그만 한 권의 책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낭중지추,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반드시 뚫고 비어져 나온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더라. '시와 산책과 아름다움'을 지켜가려는 그 삶이 고귀하게 느껴져 숨겨진 오솔길을 따라 나도 걷고 싶어 졌어. 그리고 누군가가 따라오고 싶을 나만의 오솔길도 내어보고 싶고.
왜관으로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소도시의 역명을 일일이 호명해주는 느리고 다정한 열차예요. 역에 정차할 때마다 다른 억양을 지닌 사람들이 올라타고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깊어지는 기분이에요.
오랜만에 왔어도, 역 뒤편 육교를 가로지르면 지름길이 있다는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어요. 걸음이 먼저 그리 갔어요. 그런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 소박한 집들을 몇 채 지나면, 거기에서부터 긴 벽돌담이 시작되지요. 지도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어요. 제가 그 담을 따라 들어갈 때는 부풀어 오르고, 나올 때는 눈물짓는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겠지요.
처음 수도원을 찾았을 때 신부님이 마당까지 마중을 나오셨지요. 길 끝에 온통 흰 사람이 서 있었어요. 제가 길을 다 걸어 앞에 도착할 때까지 저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으셨어요. 보통은 괜히 이쪽저쪽을 한 번씩 보게 되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우리는 멋쩍어져서요. 한 사람을 오래 응시할 수 있으려면 마음이 단출하고 단단해야 할 거예요. 그때 당신의 모습은 귀를 조약돌로 단정히 누른 백지 같았어요. 이후 저는 누구를 기다릴 때면 그 잠잠한 시선을 떠올리며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펄럭이지 말자, 다짐하면서요.
한정원 <시와 산책 p169>
좋아하는 마지막 챕터의 첫 장을 필사하여 보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심을 두느라 너무 펄럭이진 않았나 싶다. '귀를 조약돌로 단정히 누른 백지'처럼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의욕이 앞선 내게 '책은 세상에 나오면 사라지지 않는다, 후회가 남지 않게 신중하게 하자.'라고 조언한 너의 말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이 떠올랐어. 정신 차리고 보니 급하게 책을 내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더라. 그렇게 불처럼 끓어오르던 출판에 대한 열망이 사르르 사라지고 욕망이란 이름의 기름을 부어 타오르던 마음도 다시금 고요해졌어. 나는 겨울 나뭇가지에 불이 옮겨 붙듯 급하게 타오르는 성향이 있어 덜컥 내 곳간을 다 태우고 말지도 모르니 네가 옆에서 잘 좀 봐주라. 네가 하는 말은 다 잘 새겨들을게. 나 살짝 외도한 기분이 드는 2월이네. 오랜만에 숙제 주고 싶어. <끝까지 쓰는 용기>에 단어를 선물하는 재밌는 놀이가 소개되어 있었어.
"네가 좋아하는 단어 세 개만 선물해줘."
한 후에 선물 받은 세 개의 단어로 짧은 글쓰기를 하는 거야.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끼리 하기에 제법 로맨틱한 놀이 같아. 처음엔 너에게 단어 세 개를 선물할까 하는 부담스러운 숙제를 주려다가 너의 휴식을 방해할까 온점에서 물음표로 바꾸었다. 잘했지~~
"좋아하는 단어 세 개 선물해 줄래?"
2021년 2월에 여전히 읽고 쓰는 승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