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May 29. 2022

여름이 왔다

2022.5.28

오후 세 시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보다 더 빨리 짐을 싸서 나오지만 어제는 조금 밍기적 거렸다. 토요일 오후, 일을 끝내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 싫었던 걸까, 은근히 산책이라도 가려나 싶어 오빠와 혜령이를 떠봐도 오늘은 집에 있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 가고 싶다거나 한 것도 아니라 집으로 슬슬 걸음을 옮겼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들으며 완만한 언덕길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언덕길을 오를 때는 남자 주인공 입장에서의 사랑 장면이 묘사되고 있었는데 이 쨍쨍한 한 여름 날씨에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관능적인 문장들이 이어졌다. 이건 뭐 흡사 찜통 속에 들어가 앉은 것 같다. 숨도 함부로 쉬면 안 될 것 같았다.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포도주가 그의 입천장에서 맴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버건디 포도를 넣고 기계에 짜는 것이다.
그건 태양렬이다.
마치 비밀의 촉감이 내게 기억을 되살려주는 듯.
그의 감각에 감촉되어 촉촉하게 기억났다.
<중략>
내게 쏟은 그녀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줄 몰랐지.
황홀한 채 나는 그녀 위에 덮쳐 누웠지.
풍만하게 벌린 풍만한 입술,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냠.
따뜻하게 덥혀진 씨드케이크를 그녀는 나의 입에다 살며시 넣어주었지.
메스꺼운 과육을 그녀의 입은 따뜻한 신 침과 얼버무렸다.
환희, 나는 그걸 먹었지. 환희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8장 중


목소리의 주인공은 독특한 억양과 지역을 알아볼 수 없는 사투리를 심하게 쓰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의외로 많은 것이 담긴다. 나같이 둔한 사람도 그 남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50대가 훌쩍 넘은 사람이란 것을 단박에 알겠다. 책 읽어 주는 영상이 아니라 나는 '잃어버린 시간에 관해서'라 검색한 후 나온 누군가의 강의를 틀었는데 베르그송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꽃 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의 문장들을 한참이나 읽어주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어진 호우드 언덕에서의 장면. 그리고 그 문장에 이어지는 부연 설명들이 이어졌다. 오르막 길이 끝나고 평평한 길이 잠깐 등장했다. 길의 높낮이 조차도 화자가 선택한 내용에 맞추어 전개되는 듯싶었다. 그리고 다시 얕은 내리막 도로에 들어서자 여자 입장에서 그 사랑 장면을 회상하는 문장을 읊어준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성우가 새로 문장을 읊기라도 하는 것일까. 사투리도 억양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감아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문장이 이어졌다.


그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그이를 흥분시키기 위해 앞가슴이 터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방이 막 통통하게 살찌고 시작하고 있었지.
전 피곤해요 하고 나는 말했지.
우리들은 전나무 동굴 위에 누워 있었지.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바위임에 틀림없을 거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18장 중


행인 한 명 없는 길, 태양이 그늘 한 점도 만들지 않는 길. 꼴깍, 침 넘기는 소리 누가 들을까 조심스러워지는 문장들이 열기처럼 내 몸에 흡수되었다. 한증막 속에 들어와 땀을 흘리고 있으면 오히려 더위를 잊듯 그렇게 더위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다음에 이 책 읽자고 흥분해서 문자를 보내려다 참았다. 이 열기를 지금은 혼자 간직해야 할 것만 같았다. 집에 가까이 오자 발걸음이 더 느려졌다. 더위에 지치기도 했지만 이 후끈한 분위기에 좀 더 취하고 싶기도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어디쯤 오는 거야? 아빠랑 놀이터 갈 거니까 엄마도 그쪽으로 와. 아, 무더위, 믿을 수 없는 5월의 열기. 그래, 어쩌겠나. 물을 가득 챙기라 일렀다. 마지막 고비, 우리 집 '호우드 언덕'을 오른다. 오빠가 저 멀리 실외 주차장에서 양팔을 들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나도 두 손을 번쩍 들어 허우적거리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500ml 물통의 물 2/3를 단숨에 들이켜고 땡볕에서 가위바위보 놀이를 몇 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이 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