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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May 31. 2022

여름 바닷가

2022.05.29

좌회전을 하기도 전에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차들은 엄마 손 잡고 한 두 걸음 걷다가 멈춰 서 하는 갓 돌 지난 아이 같다. 앞 창문 너머로 차의 행렬을 감시하듯 바라보다 에이 모르겠다,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싶어서 몸을 뒤로 빼버렸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그 짧은 순간 잠깐 잠이 들었던가보다. 차는 어느새 주차장 입구까지 다가와 있었다. 뒤로는 여전히 차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줄지어 있었고 견디지 못한 차들이 중앙선을 넘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주차를 하고 나니 할 일을 다한 것 같이 홀가분해졌다. 얼마 전 송도 바다에서도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남들 다 대어 놓은 길가에 차 한 대가 쏙 빠지자 난 자리 몰라보게 후딱 주차하고 한 바퀴 걷다 왔는데 그 사이 견인을 당해 돈을 날렸다. '5월 바닷가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그때 했던 말이 녹음해뒀다 다시 튼 것처럼 똑같이 입에서 나왔다. 돗자리를 챙기지 않은 오빠가 무거운 캠핑 의자 두 개를 어깨에 들쳐 맸다.


 무수한 점들을 찍어 놓은 듯 인파로 가득한 해수욕장을 멀리서 보고 몰운대로 오르는 숲길로 들어섰다. 우거진 나무숲길, 새벽이 아님에도 새들이 시끄럽게 짖어댄다. 숲 속 새들은 야생미를 자랑하듯 집 근처에서 우는 새들보다 호기롭다. 혜령이가 입구에서 열 발을 걷고선 힘들다 한다. 그러다 좋은 흙길 두고 물 빠지게 만든 도랑길로 쏙 들어간다. 길이 좁아지거나 넓어지거나 끊어지거나 하면 단계를 높여가며 결승전 골에 도달하는 게임이라도 하듯 걷기 놀이에 몰두했다. 저런 것도 놀이가 된다니, 애들 노는 능력은 어른보다 뛰어나다.


오른쪽 아래 길, 자갈마당에는 그늘 한 점 없어서 길 왼쪽의 모래마당으로 내려왔다. 물에 들어가 뭔가를 잡던 아이가 '00을 잡았어요' 하고 제 아빠에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는데, 정말 00이 여기서 잡힌단 말이야 하고 속으로 놀랐다. 그 아이가 어제 잡았다고 소리친 그 생물이 무엇인지 지금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놀랐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꽃게도 아닌 것 같고...... 날이 갈수록 내 기억의 생명력은 더 짧다. 자갈해변에 의자를 펼치고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 나니 그제야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멀지 않은 곳에 등대 하나, 그리고 배 한 척이 밋밋해질 뻔한 풍경화를 살려냈다. 그렇다고 특별히 뛰어난 그림도 아니다. 어느 집 현관에 하나쯤 걸려 있을 대량 생산 복제화 같다.


물수제비를 잘 뜨는 남자는 멋지다. 물수제비를 뜨지 못하고 작은 모래알만 한꺼번에 던져 넣는 아이 사랑스럽다. 물수제비 던지기 노하우 강의가 선생 실력 탓인지 학생 능력 탓인지 교육효과가 그다지 없는 듯하다. 그래도 모든 물수제비는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풍덩 하고 크게 떨어지는 돌도 축지법을 써서 수면 위를 걷는 것 같은 돌도 다 예쁘다. 돌들이 바다와 만나 만들어내는 스파크가 별빛 같기도 하고 용접 시에 튀어 오르는 불빛 같기도 하다. 파동에 동심원이 생겼다 순식간에 사라다. 파도가 제 혼자 일렁이며 잔잔하게 넘실거리는 모양도 지겹지 않지만 돌과 만나야만 드러내 보여주는 속 모습은 낯설고 매혹적이다. 금세 사라져 버리는 건 사람 마음을 좀 오래 붙잡아 두는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는 결코 볼 수 없을, 누군가가 와서 자신을 톡톡 건드려주었을 때만 드러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바다도 알고 있을까.

 

혼자서 날던 까마귀가 한 번씩 친구들을 데리고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숙이고 소리를 질렀다. 바닷가 곤충들이 팔 위를 기어올랐다. 툭툭, 무심히 털어내는 것도 지겨워졌을 때 바위 위에서 옷을 말리던 혜령이가 쭈그려 앉더니 나를 불렀다.

"엄마 이렇게 앉아서 보면 되게 신기해"

어느 수집가가 전국 곳곳에서 찾아낸 비싼 수석을 한 줄로 나란히 전시해 둔 것일까. 물에 반쯤 잠긴 바위들이 투명한 거실장 위에 놓인 조각품 같다. 그 작품 위에 올라가서 몸을 낮추고 바라보았다. 바다와 하늘이 5:5가 아니라 8:2가 되는 낯선 풍경화. '이건 걸작이다' 내면에서 기쁨의 소리가 퍼질 때 '승희야 니 옷도 젖는다' 하는 소리에 떡 일어섰다.


갈아입을 옷 없이 아래쪽은 홀딱 젖어버린 혜령이 덕분에 지겨워지기 전에 짐을 챙겼다. 돌아오는 길은 밤의 고속도로처럼 막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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