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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01. 2022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우울한가

언제부터 예민해지기 시작했던 것일까


에어컨이 고장 난 것이 첫 단추였을까. '나 공부하기 싫음'이라고 몸으로 말하는 B가 시발점이었을까. 번갈아가며 감정 대립이 일어나는 6학년 여학생들 사이에서 그들의 감정을 방관하거나 모른 척해버리려 했지만 저희들의 냉 상태에 나도 모르게 휘둘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지금 화가 났어요, 그런데 공부까지 하라고요'하는 말은 못 하고 짜증 난다는 말투로 대답하는 S가 도화선이 된 걸까. 결국 견딜 수 없어져  똑같이 다정하지 못한 말투로 응수한 것을 두고 예의 없는 상대 탓을 했다가 인내심 없고 얘들 마음 하나 이해해주지 못하는 내 미성숙함 때문이라고 내 탓을 했다가 방향을 번갈아가며 화살을 쏴대서 그런가. 마음이 불편해 집에 돌아가기 전에 먼저 풀어주려 애쓴 것은 학생이 그만둘까 봐서일까, 여전히 착한 선생이란 인상으로 남고 싶어서일까.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한 것일까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일까.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을 모르는 P는 오늘도 숙제를 개판으로 해왔다. 그리고 버젓이 거짓말을 한다. 그런 P를 속으로 구제불능이라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오늘은 겉으로 더 이상 애써 찾은 마음의 평온을 해치기 싫다. 내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모른 척해줄게라는 약간의 비아냥을 썩은 말을 내뱉었다. 극소량의 분풀이라 P는 몰랐을 거다.  이해하는 척한 것은 위선일까. 보충수업까지 마치고 집에 가니 잘 시간이.  일은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하나. 놓지도 못할 거면 즐겁게 하자고 작심삼일 격의 다짐을 반복하는 것이 나는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인가 하고 자책을 몰고 왔다.


'다음 주에는 꼭 갈게요.'라고 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이 너무 빨리 흘러 '다음 주'가 벌써 오늘이 되었다. 몇 년째 유지해오던 관계를 끊으려니 마음이 불편하다. 단지, 더 좋아하는 일이 생겼을 뿐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인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나 스스로 은혜를 저버리고 등을 돌리는 배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애를 쓰면서까지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옳은 걸까. 마음이 가는 데로 해도 누구에게 해될 것이 없는 일을 혼자서 끙끙거리고 놓지 못한 지 벌써 몇 달이다. 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사회생활에 득이 될 거라는 마음속 계산기가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일상의 계획표를 수정해야지 하면서도 자꾸 미룬다. 그렇게 미루니 변명이 늘고 숙제를 하지 않고 변명하는 P처럼 불성실한 학생이 가질법한 부채감이 생긴다. 숙제를 하기보다 게으르고 싶다. 나는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다.  


몸은 원래 마음 따라 다니는 녀석이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니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운동도 싫고 책 읽기도 싫고 글쓰기도 싫고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하기도 싫고 설거지도 싫고 변명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혜령이 학교는 데려다줘야 했기에 한바퀴 돌고 오니 기운이 없다. 소파에 들어 누워버렸다. 오늘은 간다고 했는데, 지금 일어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몸도 꼼짝을 않는다. 티브이를 켰다. 영화를 봐야겠다. 감정이 격해지지 않는 지루한 걸 봐야겠다. 러닝타임 세 시간이란 말에 봐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영화를 한 편 골랐다. 왠지 '나 지루함'이라고 말하는 러닝 타임이 아닌가.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우울한가


영화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내게 물었다. 그러게... 나는 지금 왜 우울하지? 아무 일도 없는데... 대답하니 정말 아무 일도 없니 하고 영화가 또 묻는다.


지루할 것이란 예상은 예상을 빗나갔다. 시간은 주관적으로 흐른다. 마음이 가면 시간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극히 설레는 영화였다. 나에게 '왜 우울하냐'라고 물어주는 것도 좋았고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라'라고 조언해주는 것도 좋았다. '원래 사는 건 다 힘든 거야'하고 위로해줘서 좋았다. 몸이 해결해야 하는 일은 남았지만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았다. 다시 보기를 당장 누르고 싶은 지적인 영화였다. 원작 소설을 찾아서 장바구니 넣어두고 감독의 다른 영화도 검색해 보았다. 설거지 거리를 모른 채 하고 부랴부랴 이를 닦았고 신나게 걸어서 출근했다.


오후는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 내일이 쉬는 날이어 서일 지도 모르겠다.


2022.5월 31일 오늘도 오후에 더움, 미루던 에어컨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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