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Jun 02. 2022

그늘은 힘이 세다

회화나무 빨래터가 공원이 된지도 몇 년이다. 골목 안에 새로 생긴 두부 요릿집에서 셋이서 오랜만에 점심을 먹었다. 양옥 1층을 예쁘게 꾸며 음식을 파는 곳이 우리 동네에도 제법 생겼다. 두부요리를 먹기엔 좀 세련된 느낌이지만 맛이 좀 덜 해도 역시 분위기는 중요하다. 너무 배가 고파도 못 걷지만 너무 배가 불러도 걷기가 힘들다. 밥을 먹고 나오니 한낮,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마침 공원 앞 가림막의 혜택을 받은 벤치에 자리가 있어 냉큼 달려가 앉았다. 바람 한 점 없었지만 그늘 밑은 덮지 않았다.


혼자 운동 기구를 그네 삼아 놀던 혜령이가 한 여자 아이를 보고 반색했다. 반에서 제일 친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수령 650년이 넘는 커다란 밑동 세 개를 가진 회화나무를 빙글빙글 돌며 아이들이 놀기 시작했다. 5월 되고 내 퇴근시간이 늦어지다 보니 혜령이를 오빠가 집으로 데려오고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엄마 얼굴을 보는 것도 겨우 두세 번, 둘이서만 앉아서 이야기할 여유도 많이 없다. 사실 둘이 앉아서 할 특별한 이야기도 없다. "어제 생닭을 사서 튀겼는데 대박이었다." 이미 오빠한테 들은 이야기다. "현준이가 한 달 동안 미술학원 쉬고 기말고사 준비할 거래." 이미 언니한테 들었을 이야기다. "이번에 사돈 댁에서 보내주신 마늘 참 맛있더라, 어제 전화는 드렸나?" "응, 요즘 죽순 파신다고 바쁘셔." 그렇게 이어진 대화는 무맛 무미의 죽순을 어떻게 하면 맛있게 갱생시킬까에 대한 각자의 요리법 공유에서 눈 건강이 안 좋아지는 어머님 이야기로, 올봄에 유난히 지인의 부모님들이 많이 돌아가신 이야기로, 49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절에 다녀보니 오히려 49제 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더라. 너희 큰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님이 절에 49제도 안 올리고 집에서 기도한다 했을 때 돈도 많은 집이 왜 저라나 싶어서 말이 많았제. 지금 생각해보면 내 생각이 짧았던 긴데...... 나는 49제 안 해도 된다, 너거한테 이 말을 언제 기회가 되면 하고 싶었다."

 "엄마한테 물어볼게 뭐 있노. 니 가고 싶으면 어디든 갔다 온나. 젊어서 많이 다니야제. 나는 딸이 둘이라서 친구가 많이 없어도 불편한 게 하나도 없더라. 그래도 너희는 젊으니까 친구들하고 추억을 많이 만들어라. 갈 수 있으면 어디든 가고. 혜령이는 내랑 잘 논다 아이가."

"그것도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저번에는 니가 미련이 남은 것 같아서 계속 해보라 한 거고. 공부 그만큼 했으면 혼자서도 니는 잘 할끼다. 사람들 하고 어울려 다니는 것도 잘하는 사람이 한데이. 나도 여러 사람들 하고 함께 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


새로 사 입은 치마에 노느라 물을 흠뻑 적신 혜령이가 뛰어왔다가 더 놀아도 되냐고 물어보고 달려갔다. 옷은 금방 마를 테니 더 놀아라고 보내주었다. 배가 꺼지지 않는다면서도 우리는 오늘 저녁에 뭘 먹을까 의논했고 주말여행 때 김치를 가지고 갈 건지 아닌지에 대해 옥신각신했다. 아빠의 식탐을 흉보았고 현아의 입 짧음에 한탄했다. 햇볕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혜령이 옷은 금방 말랐다. 할머니 한 분이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리셨다. 자리를 양보하고 옆 의자로 갔다. 고작 1m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햇빛이 조금 쬐어들어오는 왼쪽 어깨가 금세 뜨거워졌다. "혜령아 그만 가자."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지 않냐고 도넛을 사주겠다고 꼬셔서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양산을 들고서도 그늘을 찾아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신다. 양손에 짐을 든 나는 엄마보다 더 빨리 지쳐 '엄마 그냥 천천히 가자'라고 뒤에서 소리쳤다. 엄마가 '여기서 좀 쉬자'하고 멈춰 선 곳은 복개도로변 가의 자동차 부품가게 앞이다. 걸어오던 도로 끝, 방향을 틀어 오르막을 오르기 전이다. 유리창 앞으로 작은 턱이 있어 걸터앉기에 알맞다. 건물 덕분에 생긴 그늘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남의 가게 앞에서 민폐가 아닐까 싶어 유리창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시속 30km 표지판이 우리에게 천천히 가라고 한다. 셋이서 짐을 부리고 물을 나누어 마시는데 엄마가 그런다. "나 혼자면 여기 앉도 못했다."

 

마지막 고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엄마는 비가 와도 아무리 더워도 아파트로 향하는 상가 건물 계단을 오르지 않는다. 무릎이 아파서다. 젊은이들은 햇볕도 피하고 빨리 올라갈 수 있기에 다들 계단으로 쏙 들어가는데 어르신들은 대체로 빙 도는 아파트 정식 입구를 지나신다. 가파른 오르막의 시작 부분에 아파트 입구가 있고  넓이 1 제콥 미터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 의자처럼 마련되어 있다. 철문으로 덮어 놓은 그곳의 용도는 삼십 년이 넘도록 나는 모른다. 엄마는 당연한 듯 그곳에 짐을 내려놓고 걸터 앉았고 혜령이는 철문 위에 서서 쿵쿵거린다.  

 "여기 골목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잠깐 쉬어야 집까지 한 번에 간다. 앉아 봐라. 우리 아파트 가는 사람들 다 여기 한 번 앉아다 간다."

조금 전에 쉬었는데 또 쉬나, 짐 들었다 놨다 하는 게 더 귀찮은데 싶은데 어디 숨어 있다 이제야 나오나 싶은 반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텁텁한 바람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그늘과 멋진 하모니를 이루는 바람을 맞으며 '나 혼자면 여기 앉도 못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늘은 힘이 세다. 쨍쨍한 여름날 쉼터가 되고 햇빛 속으로 다시 나갈 힘을 준다.

엄마는 그늘이다.


2022.6.1 수요일, 무척 더움. 선거일이라 오후의 산책을 즐김.

매거진의 이전글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우울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