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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04. 2022

포옹

오늘 새벽에 알랭 드 보통의 <평온> 4장을 읽었다. 생각보다 마음을 확 끄는 구절들이 없는 탓인지 잠을 채 다 깨지 못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눈과 목이 동시에 하강하길 여러 번. 오늘은 집중이 안 된 탓인지 앞부분에서 인덱스 표지를 붙여놓은 부분이 한 군데밖에 없다. 숭고함에 대해 인상적으로 정의한 부분이 있었는데 오늘의 한 문장은 고 녀석으로 해야겠다 싶을 때 드디어 4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


안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포옹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내가 잘해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인정과  함께 보호와 응원을 간절히 바란다는 더 큰 뜻이 포함되어 있다. 포옹은 고도로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우리 문화가 놓친 어떤 것, 즉 우리의 '의존성 와 연약함'에 대한 적극적 인정을 상징한다.

알랭 드 보통 <평온> p169


포옹을 '의존성과 연약함에 대한 적극적 인정'이라고 하다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본 것처럼 신선함이 느껴졌다. 공책을 펼치고 떠오르는 느낌을 예쁜 상차림이 아니라 대충 썰어 담아 오늘의 단상을 차렸다.


<다시 차린 상차림>

엄마, 오빠와의 포옹은 반갑다는 인사다. '잘 다녀와', '오늘도 수고했어' 하는 소리를 품고 있다. 아이들과 나누는 포옹은 잘 맞지도 않은 과녁에 쏘아대는 사랑의 화살이다. '지켜줄게'라는 의지를 품고 있다.   '의존성과 연약함에 대한 적극적 인정'의 포옹은 언니에게 안길 때다.
언니와는 아주 가끔 포옹을 한다. 힘이 들 때나 힘들겠구나 싶을 때 안아주고 안긴다. 빈도는 낮지만 농도는 높은 그 포옹은 짜릿하다. 좋은 것을 표현할 때보다 힘든 것을 나눌 때 포옹의 진정한 치유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그런 묵직함이 있다.
오늘은 별일이 없어도 언니를 좀 안아봐야겠다.

 

오늘도 언니는 차를 타고 일찍 출근을 했고 나는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가며 느릿느릿 걸어서 출근을 했다. 언니 안아주기 프로젝트를 실행하려고 대문 앞에서 이어폰을 빼서 정리를 했다. 언니의 반응이 예상되었다. 분명 '무슨 일인데' 걱정스레 묻겠지. 나는 '아무 일도 없다' 대답하겠지. '무슨 일이 있는데' 하고 의심하겠지. 나는 아무 말도 않겠지. 그럼 언니는 '애가 무슨 일이 있구나' 확신하겠지. 옛일들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실연해보니 큭큭 웃음이 났다. 막상 연기를 하려니 조금 쑥스럽다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언니는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도 빗자루를 챙겨 드니 거의 다했으니 더우니까 앉아 쉬라고 한다. 가방을 두고 에어컨을 틀고 '덥다 덥다 진짜 덥다'를 연발하고 있으니 언니가 들어와 커피를 탄다. 이 때다.

"언니야"

하고 두 팔을 벌렸다. 언니가 망설임 없이 "어, 그래..." 하며 안아준다. 시나리오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진짜야, 별일 없어. 오늘 아침에 책을 읽었는데......"

정말 무슨 일이 없는지 캐묻는 언니를 안심시키려고 이러쿵저러쿵, 오늘의 단상을 그대로 읊었다.

"'의존성과 연약함'의 표현이라는데 언니가 생각나더라고. 오늘은 꼭 안아보겠다고 썼다. 잘했제. 웃기제"


고개를 치켜뜬 언니 눈에 툭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보자 멋쩍은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우리는 울지 않고 각자 책상에 앉아 냉커피를 마셨다.


2022. 6.3  묻어두기엔 아까운 장면들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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