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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05. 2021

내가 사랑하는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고서

<예술의 주름들>나희덕 시인이 시인, 미술가, 음악감독, 영화감독, 목수, 가수, 피아니스트까지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서른 명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글을 엮은 책이다. 시인답게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예술가의 일면을 시처럼 간결하게 풀어낸다. 긴 호흡의 글들이 아니기에 다소 그 깊이가 아쉽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매력적인 친구를 너도 한번 만나봐.' 라며 소개글을 내미는 듯 한 재미가 있었다. 특히나 매번 같은 부류의 사람만 만나고, 비슷한 책만 골라 들게 되는 내게 믿을만한 작가의 친구 리스트는 책 가격이 아쉽지 않을 거래였다. '아녜스 바르다'를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은 보는 내도록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 만큼의 미소를 띠게 되는 영화다. 90분 동안의 미소는 짧은 박장대소 보다도 그 파장이 오래도록 남았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처음이었다. 그 신선함에 깜짝 놀라 정보를 좀 찾아보았다. 저절로 이 영화를 다시 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한 장면도 지루할 구석이 없는 인생처럼, 한 순간도 지루한 구석이 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여든여덟 살 귀여운 할머니,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55세나 차이나는 83년생 젊은 사진가 JR업으로 만들어진 로드무비다. 아녜스 바르다는 사진작가 겸 배우, 영화감독, 비주얼 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함으로 예술 활동을 해 온 벨기에 출신 프랑스 예술가다. 사진작가 JR은 포토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대형 사진을 찍어 벽 등의 공간에  붙이는 작업을 하는 사진 아티스트다. 바르다의 딸 소개로 만난 두 아티스트가 자신들이 해 온던 영화 찍기, 사진 설치작업을 공동으로 해보기로 의기투합한다. 그를은 노래를 부르고 대화를 나누며 프랑스  마 자신들 추억의 장소를 포토 트럭을 타고 누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 벽에 설치하는 모습, 그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을 영상으로 담는다. 


아름다운 프랑스 전원풍경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은 좀 더 소박하고 낡았다. 그곳의 사람들 역시 상상하는 파리지앵의 이미지는 전혀 없고 시골 이웃사촌 같다. '멋진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는 게 난 좋았어.'라고 말하는 바르다 할머니의 말처럼 여정도 만남도 즉흥적이다. 인생도 영화도 필연적 우연에 의해 콜라주 되는 것일까.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평범한 우리의 생이 의미 있게 재조명된다.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다. 모래알처럼 흩날려 흩어져버릴 오늘과 내일이지만 순간 포착된 인생의 단면은 아름답다.


난 별의 보호 아래서 태어났죠.
나의 어머니, 달이 준 차분함
나의 아버지, 태양이 준 따뜻함
그리고 삶의 터전 우주
인생에서 나의 무대는 광활해요


바람 소리와 풍경 소리만이 가득한 산속, 최저 생계비로 생활하는 자연인 할아버지의 시 같은 대사는 삶이 연출된 예술보다 한 수 위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자신의 사진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할머니, 조기퇴직자의 텅 비고 깊은 눈빛, 모델처럼 우아해진 카페 여직원, 사진을 통해서만 다 모일 수 있는 공장 직원들, 인간이나 염소나 다 같다는 농장주, 컨테이너 위에서 춤추는 부두 노동자의 아내 등.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나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평생 몰랐을 인연이다. 우연히 만났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 친구를 만들고 서로의 삶에 추억을 선사한다. 자신이 감독이 주인공이고 자신의 삶과 생각이 영화의 줄거리가 되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예술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삶에 훈훈한 추억만 남는 게 아니듯 어쩔 수 없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많다. 기 부르댕을 추모하기 위해 바닷가에 공들여 설치한 사진이 하루 만에 밀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유한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다. 앙리 가르티에 브레송의 스산한 무덤가에서도, 시력을 잃어가는 바르다의 눈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도 인간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노병사의 무게 어깨가 조금 무거워지는 것 같다. JR은 바르다의 발과 눈을 찍은 사진을 대형 화물차에 붙임으로써 온 세상을 계속 누비고 다니라 기원한다. 긴 세월, 바르다의 눈과 발이  온 공적을 기리며 마치 노쇠해 가는 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뭐니 뭐니 해도 내게 이 영화의 명장면은 장 뤽 고다르를 찾아가는 마지막 여정이다. 고다를 추억하며 루브르를 누빈 그들은 은둔한 옛 친구를 찾아간다. 하지만 고다르는 추억을 암시하는 메시지만 남긴 채 만나기를 거절한다. 옛 친구의 행동에 마음이 상한 바르다 할머니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영화 내도록 선글라스를 벗 않는다는 이유로 바르다에게 핀잔을 들었던 JR은 예전 고다르가 바르다를 위해 딱 한 번 선글라스를 벗어주었던 것처럼 그녀를 위해 선글라스를 벗는다.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그녀의 눈에 비친 JR의 모습이 흐릿한 것은 내 눈가도 흐릿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정의 중간중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그 대사처럼 잔잔하고 포근했다. 배경음악 같던 한여름 매미소리마저 가슴을 파고들던, 영화.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을 사랑한다.


나희덕의 '예술의 주름들'을 읽으며 나도 시인처럼 내 글을 읽고 누군가는 그 영화를, 그 책을, 그 음악을 경험하고 싶게끔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긴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은근한 비유와 적절한 거리두기로 세련되게 독자를 유혹하는 글. 나만의 문체가 녹아있는 개성적인 소개글을 꿈꾸었으나 역시 좋아하는 건 넘치기 마련인가 보다.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 없듯 다시 읽어보는 글에 아녜스 바르다에 대한 나의 애정이 명명백백 적나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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