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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12. 2021

엄마-엄마의 하소연

 올해처럼 무더운 여름이 있었을까, 하고 매년 생각하는 듯하다. 신기록 갱신하듯 더워지는 여름 더위 탓에 외출이 무섭다. 시냇물조차 다 말라버릴 듯한 무더운 여름을 싫어했다. 아니 무서워했었다. 나에게 여름은 유난히 가혹했다. 속옷을 가득 적시던 땀의 양에 비례해 무기력해졌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단지 인생의 1/4만이 그 요물 같은 기계와 함께 했건만 선풍기와 부채, 골목바람에 의지해 여름을 나던 때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집에 에어컨을 장만하며 내 인생의 3/4를 함께했던 비만도 사라졌기에 여름이 나에게 그렇게 가혹했던 주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세상에 그렇게 더운 여름이 또 있을라고."

내 생일날 식구들이 뜨거운 음식을 앞에 두고 한자리에 모였을 때 엄마가 대뜸 말씀하셨다. 붙어 앉은 사람의 온도와 음식의 열기에 에어컨도 다소 무력해 있었다. 선풍기라도 더 겠다고 나는 성화를 부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나는 장마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에 태어났다. 그 여름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지만 무오년 기미월(戊午年 己未月), 여름의 절정이다. 어디 무릎 꿇을 곳 조차 보이지 않는 열기가 글자에서 느껴진다.


"니 낳고 몸조리할 때, 얼마나 덥던지. 몇십 년 만의 더위라고 티브이에서 그랬다 아이가. 더위에 지쳐 골목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에 나와 앉아 있으면 어머니 불호령이 떨어졌디. '아 낳은 사람이 바람이 웬 말이고! 니가 빨리 몸조리하고 일어나야 일하는 식구들 밥도 해주고 할낀데 얼른 들어가라' 하고 삼 시 세끼 뜨거운 미역국을 차려 놓으시고선 감시하듯 지켜보시는데 내가 이 집에 밥해주러 온 사람인가 싶어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아이가."

'세상에 할머니가 그랬단 말이가. 어떻게 아 놓고 누웠는 며느리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노, 그것도 우리 엄마한테' 하고 자식들이 엄마 역성을 들자 '뭐 느그 할머니가 내 미역국 먹일라고 그란기겠제' 하고 또 편을 드셨다. 우리들의 호응에 힘을 입은 엄마는 말을 이어가셨다.


"느그 언니 때는 어땠는가 아나. 니 하고 다르게 또 어찌나 춥든지. 몇십 년 만의 추위라 안 했나. 동지 지나고 얼음이 어는데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나왔데이. 아 놓고 그날 바로 집에 와서 누웠다 아이가. 할머니가 끓여 온 뜨거운 미역국도 자꾸 먹으니 지겨워죽겠는기라. 집에 미역이 한가득 있었데이. 옆집 살던 형님도 얼마 전에 경석이를 낳았다 아이가. 그때 형님 엄마가 형님 아들 낳았다고 좋아서 염소 고은 거하고 미역 하고 한 가득 싸서 오셨다 아이가. 몸조리할 때까지 한 달이나 있다 가셨나. 그때 갖고 온 미역, 온 식구가 한 일 년 먹었을기다. 다른 국으로 끓여주면 안 되냐고 그 한마디 말을 못 했다. 너희 큰 이모는 일하느라 바쁘지, 너희 외삼촌은 '배 타는 사람은 아 낳은 집에 가는 게 아니'라고 와 보도 못했지. 친정 식구 아무도 없이 혼자서 그때 참 서럽데. 얼굴도 못 본 엄마가 그렇게 그립고 미워본 거는 처음 인기라." 처음 듣는 엄마의 속마음이었다.


"첫째는 딸이라도 괜찮았는데 둘째까지 딸 놓고 보니 그만 눈물이 터졌다 아이가. 니는 맨날 니가 남자 아가 아니라서 내가 울었다고 섭섭해했지마는 그런 게 전혀 아이다. 내 딸들이 내 같은 아픔을 겪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어찌나 아프던지. 나는 내 딸들 결혼해서 아 낳으면 몸조리 꼭 내가 해줄끼라고 그때 다짐했데이."

어렸을 때 나는 엄마가 나를 낳고 울었다는 말을 엿듣고 섭섭한 마음을 오래 품었었다.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첫째는 기다리던 첫 애라, 막내는 기다리던 아들이라 좋았는데 그럼 나는 뭔데' 하고 대든 적도 있다. 딸이 또 여자로 태어나 엄마가 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란 말은 믿지 못했다. 내게 둘러대는 핑계라고만 생각했었다.


 내가 엄마의 나이와 내 나이를 비교해보는 것은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다. 엄마는 그때 평균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는데 그게 바로 26세다. 나는 엄마보다 딱 10년 늦게 결혼했다. 는 그 나이에 자유로이 유랑했으나 엄마는 평생 이어질 '엄마' 역을 맡을 몸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들은 어떻게 그리도 일찍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엄마는 번화가 미용실의 헤어디자이너셨다. 아빠가 엄마와 결혼을 하며 미용실을 집 근처에서 하실 수 있게 가게를 하나 차려주셨고 엄마는 꿈꾸던 미용실 사장님이 되셨다. 아빠는 목수셨는데 십여 명 되는 직원들을 데리고 계셨다. 아빠의 작업장이 집 근처라 엄마는 미용실 사장님 타이틀과 함께 대식구 점심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장 직함까지 얻으셨다. 김치도 담그지 않던 두 식구, 단출한 살림을 꾸리셨던 엄마는 끊이지 않고 김치를 담그는 집에 시집을 간 것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언니가 생겼다. 불러오는 배를 안고 손님들 머리를 만지고 뜨거운 국냄비 앞을 지켰다. 만삭이 될 때까지 놓지 못했던 미용실 사장님 타이틀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그 뒤 이년 후 여름, 엄마는 다시 한번 만삭이 되셨다. 몹시 무덥던 그날도 뜨거운 국냄비 앞을 지키고 계셨겠지. 등에는 언니가 업혀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전성기가 아이들 기저귀를 빨고 너느라, 김치를 담고 국을 끓이면서 지나갔다. 그 후로도 아이 셋을 데리고 외출 한 번 하려면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던 시절이 지나갔다. 딸의 딸들과 아들을 손수 기르시는 동안 엄마의 환갑과 칠순이 지나갔다. 한 사람의 일생이 엄마의 일생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현모양처의 현장을 헤쳐 나온 전통적인 삶을 살아오신 셈이다.


 엄마는 그릇을 깨뜨려도 음식을 쏟아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다. 실수에 관대한 분이셨다. 우리 세 남매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가 무서워지는 때는 우리끼리 싸울 때뿐이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거의 하지 않으셨고 집은 대체로 정돈되어 있었다. 삼 시 세끼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밤 외출을 삼갔다. 엄마의 삶을 당연스러워했다. 엄마는 특별히 힘들어하지도 않으셨기에 엄마가 우리를 키우며 마냥 행복하신 줄 알았다. 겪어 봐야 아는 지혜롭지 못한 부류에 속하는 내가 엄마의 행복에 의문이 든 것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난 다음이다.


며칠 전 혜령이가 카펫에 우유를 쏟았다. 쏟을 것 같은 예감에 주의를 몇 번 준 후였다. 나도 모르게 '고혜령, 얌전히 마시라고 했잖아. 빨기도 힘든데 저걸 어째"하며 언성이 높아졌다. 방학이라 집에 있으니 내 책상은 혜령이 물건들로 넘쳐났지만 일주일채 방치되었다. 놀아주기에 지쳐 자주 티브이를 틀어주고 일기 쓰기 숙제를 해라고 잔소리를 한다. 출산 후의 시간들은 이론과 실천이 얼마나 다른지 매일매일 깨달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다. 당연시하던 것들의 이면을 보면서 나는 엄마의 정성과 사랑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보고 배운 것은 엄마의 헌신적 사랑이었으나 내가 재현해내기에 버거운 미션이었다. 엄마처럼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면 나를 자책했다. 엄마의 지극한 희생 부메랑처럼 아이에게 날려 보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의 속내가 궁금했다.

"나는 아이 한 명도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는 애 셋을 어찌 낳아가 키웠는지 상상이 안된다. 나는 옆에 엄마가 있어도 힘든데... 생각해보면 내가 한참 자유롭게 놀던  나이에 엄마는 애 셋 하고 집에서 독박 육아를 한 거잖아."

몇 번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물어도 '나는 가족을 돌보는 게 평생의 보람이고 기쁨이고 행복이었다'는 엄마의 모범답안은 한결같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죽을 끓인다고 한참 서 있으면 '죽 끓이는 게 보통일이 아니제' 하셨다. 기저귀를 척척 말아 휴지통으로 던지면서 '진짜 세상 좋아졌다. 기저귀 빨래만 안 해도 천만다행이다.' 하셨다. 애를 맡기고 놀러 나갈 때 미안해하면 "엄마도 숨 쉴 구멍이 있어야 된다. 아 하고 남편만 챙기면 속이 얼마나 답답하겠니." 하시니 무엇이 엄마 마음속 진실인지 미루어 판단해야 할 뿐이다.


헌신. 몸서리처지도록 비합리적인 이 단어를 실천하는데 진심은 필수요소였을 것이다. 엄마의 전성기는 우리 셋을 기르느라 쩔쩔매던 그 때라는 말이 스스로에 대한 위로도, 우리를 향한 듣기 좋은 배려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 아침밥에 진심인 엄마 밑에서 자라, 아이의 아침밥엔 진심이 되지 못하는 엄마가 된 나는 엄마의 하소연이 듣기 좋다. 세상에 사랑만으로 채워진 '엄마'역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숨구멍인가.

"엄마~~~" 하며 두 딸이 달려들었다.

"할머니~~~~" 하며 손주들이 합창을 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니밖에 모른다. 할머니가 최고지 뭐."하고 아빠가 추임새를 넣으셨다.

물론 그 와중에도 몇십 년 만의 여름도, 몇십 년 만의 겨울도 아닌, 단풍이 물드는 가을의 끝무렵에 태어난 남동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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