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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16. 2021

괄호를 열고 닫는 것은 나

 

#휴가의 끝

트로페지엔/ 베른하르트 슐링크/ 여름 거짓말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도 필요한 것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가 나른한 꿈처럼 펼쳐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올리브가 익는 곳에서의 휴가를 닮은, 미혹으로 가득 찼지만 아름다운 거짓말이. 하지만 여름의 끝을 알리는 폭우마저 그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트렁크를 창고 깊숙이 넣어두어야 한다. 틀림없이 쓸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계절은 바뀌고, 괄호 안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백수린 산문집 '다정하게 매일매일' p42


휴가지에서 만난 리처드와 수전이 사랑에 빠지고 결국 미래를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뻔한 사랑이야기처럼 보인다고 백수린 작가는 말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10%도 되지 않는 소설 속 이야기라 생각한다. 혼자서 기차 여행을 할 때면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이야기가 통하는 근사한 남자가 우연히 옆자리에 앉지는 않을까, 그 사람과 저절로 대화가 이루어져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순간적이지만 무슨 본능처럼 그런 바람이 일었지만 내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기적이 일어나 사랑에 빠졌더라도 일상을 포기하고 사랑의 결말을 맺는다니. 그것이야말로 소설에서만 있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결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결말에 나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왜일까? 리처드의 선택이 나의 선택과 닮았기에, 사랑보다 일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외면한 자신의 비겁함에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속하고 싶은 여행을 그만두고 일정에 맞춰 비행기를 탈 때  나 역시 그것이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해왔다. 모험 속 세상으로 뛰어드는 것과 지금껏 일구어 온 일상에서의 편안함 사이에서 항상 후자가 이겼다. 세상을 유랑하는 여행작가를 꿈꿨지만 나는 국어강사의 일상으로 여지없이 돌아왔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 옆자리 근사한 남자를 꿈꾸지도 모험과 일상을 견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리처드처럼 휴가가 끝나면 트렁크는 저 깊숙이 넣어버리고 괄호 안의 넣어둔 일상과 대면한다. 하지만 1%의 어떤 사람은 다시 트렁크를 꺼내 들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기도 한다. 괄호를 열고 닫는 사람은 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매혹되면서도 '성수기가 끝나고'에 안주하고 마는 것.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기를 두드린 나의 선택이고 지금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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