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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l 27. 2021

언감자와 찬두부

선후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언감자와 찬두부'라는 말을 어느 글에서 본 것이 알, 냉장고에 들어간 지 제법 오래된 찬두부와 깎은 감자가 재인식된 것이 닭일지 모르겠다. 당연히 명확한 논리는 없지만 나는 알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타입니다. 데미안의 그 유명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문구 때문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근원 신화 속 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감자와 찬두부'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시기를 상징하는 북한의 관용어라 한다. 그러나 내게 '얼어 가는 감자와 유통기한 조금 넘긴 찬두부'는 시급히 처리해야만 하는 숙제일 뿐이다.


봄 감자, 여름 옥수수, 겨울 고구마. 사시사철 연이은 시골 어머니표 택배 상자 덕에 제철 작물과 야채, 과일까지 식탁은 매번 풍년이다. 올해는 특히 감자 나눔도 많아  여름 시작부터 집에 감자가 끊이지 않았다. 택배 상자를 식구 많은 친정에 맡기고 조금씩 먹을 만큼 가져와 먹어도 좀처럼 숙제가 줄지를 않는다. 떨어진 쌀 한 톨도 주우시는 아버님 모습을 본 후 나도 시골에서 온 음식 돈으로 보려 한다. 학원 아이들에게 옥수수, 감자 등이 인기가 있을 리 없지만 가끔씩 쪄내곤 했는데 시국이 이러하니 나누어 먹는 것도 삼가게 되었다. 올해는 껍질을 벗긴 후 포슬포슬하게, 감자 삶기에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이지 어느새 바구니 속 감자는 다이어트 정체 현상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잊고 있던 감자에 싹이 제법 났길래 남은 감자 모두 목욕을 씻겨 껍질을 벗기고 냉장고 속에 넣어두고도 한참이 지났다.


소금이나 물처럼 익숙하여 당연존재가 스스로 이름을 밝히며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오늘 아침 무얼 먹을까 궁리하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릴 때 '언감자와 찬두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갈 때까지 간 녀석들이었다. 새로운 감자 요리를 검색하려고 네이버를 켰다. '감자'라고 쓰고 스크롤을 내리니 지식백과와 나무 위키 '감자'가 눈에 들어왔다. 있으려나 싶은 정보뿐만 아니라 어디서 이런 것까지 감탄하게 되는 긴 문서. 감자의 모든 것이 담긴 보고서 한 편을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세상은 놀랍다. 김동인 소설 '감자'가 실은 '고구마'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손가락을 위아래로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꼼꼼하게 감자를 탐구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 고구마란 원래 스위트의 대명사. 불쌍하게 죽어가는 복녀의 인생에는 무미건조 감자가 더 어울리는데.


1874년 아일랜드에 감자 역병이 돌아 그 지역 감자가 순식간에 전멸했단다. 그 여파로 아일랜드인 1백만 명이 사망한 대기근을 불러왔다니 만만한 녀석만은 아니다. 게다가 덩어리를 제외한 모든 부위가 독성을 띈 독초라고 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을 빗대어 부른다는 스몰 포테이토란 단어는 역시  감자를 너무 깔본 단어 같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까지 덤으로 쭉 읽었다. 이름도 맛도 심심한 그 '감자'가 좁디좁은 내 인식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문을 열고 들어와 당당히 자리 잡고 앉는 느낌이 들었다.


생장을 개시하면 즉시 열리기 시작하여 열매처럼 다 익어야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크기에 상관없이 언제든 따먹을 수 있다는 감자. 춥고 척박한 땅에서 더 잘 자라고 맛도 좋다는데 우리 집 냉장고에서 강한 생명력을 증명해 내고 있었다. 다시 옷을 입은 듯 갈색으로 변한 감자 세 개를 꺼내어 단속을 했다. 도구의 도움을 받아 후다닥 채를 썰었다. 물에 담가 전분을 제거 한 감자와 딸을 위해 썰어 둔 햄을 한 곳에 모아 소금 간을 했다. 치즈와 함께 섭취하면 감자에 부족한 단백질, 지방을 보충할 수 있다는 문구에 힘입어 냉동실에서 자기들끼리 얼싸안고 있는 녀석들도 꺼냈다. 그래, 치즈 따윈 아끼는 게 아니지. 다이어터의 신분을 망각, 고소한 냄새에 잠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맛이 내 미각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정도는 아니었으나 둘이 앉아 그릇에 기름만 남을 때까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다. 언감자와 찬두부에서 찬두부는 어떻게 되었나. 새로운 시도가 모두 성공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플라스틱 그릇에 다시 옮겨져 냉장실로 돌아갔다. 감자는 1도에서 4도 사이의 온도에서 사과 하나와 함께 두면 좋다고 한다. 사과가 에틸렌 가스를 형성해 싹을 띄우지 않고 장기보관 가능하다는 생활 꿀팁도 바로 써먹었다. 아직 남은 헐벗은 감자에 대한 죄책감이 꿀에 희석되었다. 감자의 시가 끝나기도 전에 어머님이 복숭아를 한 상자 보내셨단다. 수확한 것 중 예쁜 것만을 골라서 담으셨겠지... 쌀 한 톨도 주우시는데... 작은 한숨과 함께

조만간 복숭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강제로 넓히기 위해 지식백과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새롭지 않을 수도 있는 복숭아 요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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