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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24. 2021

'너(오타쿠otaku, 御宅)'

고유한 너로 살아가기를


"너희들은 이름이 뭐야?"



혜령이와 주말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도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그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도쿄뿐인가, 일본의 시골과 자연이 아름다운 영상에 담겨있다. 일상의 소소함, 잊지 못할 멜로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다 주는 주제 의식까지.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를 하고 첫 소개팅 장소에 나가는 듯한 설렘이 서서히 충전되는 것 같다. 달콤 쌉싸름한 디저트로 마무리되는 그 여운의 힘으로 다시 찾고 싶은 식당이 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너의 이름은?" 이란 대사의 힘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월요일 오후였다.



"너희들은 이름이 뭐야?"

새로 들어온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J는 첫 만남부터 우리를 다소 긴장케 하는 면이 있었다. 보통 처음 새로운 장소에 임하게 되면 평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들어내지 않고 주위를 살피기 마련이다. 같은 학년 남학생만 세 명 있는 교실에서 대뜸 돌아가며 이름을 물어보는 여학생의 서글서글함은 새로운 학생을 맞이하여 되려 긴장한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학교도 다른 낯선 아이, 거기다 여학생. '저 애 뭐지?' 하는 눈빛의 세 남학생들도 "나보다 키가 크네. 도대체 키가 몇 센티고?"라는 물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한 번도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J는 수학 문제 풀이에 익숙지 않았지만 가르쳐 준 것을 쉽게 이해했다. 머리는 검은 고무줄 하나로 대충 묶고 다녔고 입는 옷도 한결같이 편안한 체육복 스타일이었다. 나도 질끈 묶는 머리 스타일을 사계절 내내 고수하는 타입인데 그런 나를 보고 '우리 반에 자연인이 두 명이에요.'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재치를 발휘해 주변을 밝히는 아이였다.



"주말엔 무얼 할 거야?"

금요일의 단골 화제는 답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다. 매주 물어보는 그 물음에 대한 아이들 대답도 크게 변함은 없다.

'게임, 게임, 게임, 어떠다 축구'는 남학생들의 대답이고 '유튜브, 유튜브, 유튜브 어쩌다 잠'은 여학생들의 대답이다.

"저는 만화를 볼 거예요."

J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척 반가워서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일본 만화랑 애니를 좋아해요."

망설이지 않고 줄줄줄 작품 이름도 말했다. 그때 옆에서 "십덕이다, 오타쿠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타쿠는 알겠는데 십덕은 또 뭔가 싶어 남학생이게 물었다.

"오타쿠+오타쿠(5+5=10)에요."

그 대답에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너스레를 떨었다.

"쌤도 애니 엄청 좋아해. 나도 오타쿠야 오타쿠."



"십덕이라는 말에 잠을 못 잤아요."

그 후 다음 월요일 수업에 들어온 J는 뜬금없이 말했다. 주말 내도록 그 말이 마음에 박혀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드니 아이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타쿠가 비웃음 당할 만한 것인가. 오타쿠는 본래 ‘당신’, ‘댁’이라는 뜻을 지닌 2인칭 대명사의 일본어로 '너'의 높임 표현이다. 같은 취미를 좋아하는 낯선 사람들이 동호회에서 만나 서로를 존중하는 뜻을 담아 부르다가 굳어진 말이다.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집착증을 가친 마니아로 의미가 변질되었지만 나는 오타쿠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무언가에 깊이 빠질 수 있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 비단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는 세속적 성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평생 질리지 않고 즐기며 몰두할 무언가 가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도 경험으로 익혔다. 몰입할 수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자신에게 축복이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생각이 팽배한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따가운 시선이 있다. 어른들도 역시 그 시선들을 견디지 못하고 튀지 않고 평범하게 적당히 잘 살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지 않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타인에게 평가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인정받지 못하면 감추거나 부끄러워하며 드러내길 꺼리게 된다. 어른이 나도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물며 아직 자아가 굳게 서지 않은 아이들이야 더 그렇지 않을까. 친구나 어른의 한 마디에, 무거운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각인되는 부정적 감정들이 여과없이 저장될 것만 같다.



나 역시 엄마로서 아이를 고유한 개성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아이로 키워야지 하지만 말 잘 듣는 무난한 모범생으로 크도록 유도한다. 아이들의 '아니요, 싫어요'라는 대답을 싫어하고 '네'라는 대답을 편애한다. 훈육이라는 명분 아래 '하지 마, 안돼'를 성찰 없이 남발할 때도 많다. '할 수 있어' 란 말은 하기 싫은 것을 시킬 때, 내 판단에 걸려진 사항일 때만 꺼내 쓴다.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았는데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너무 튀는 것을 미리 걱정한다. 하지만 세상일 뜻한대로 되지 않듯 내가 유도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는 게 또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이들은 대체로 엄마의 잔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듯 '하지마, 안돼' 같은 말들도 잘 흘려보낼 것이다. 정작 잔소리는 나 스스로에게 해야겠다. '이번 주말에는 게임만 할 거에요.'라는 말은 '이번 주말에는 책만 볼 거에요.' 와 다름이 없으니 '안돼, 하지마' 란 말을 아껴보라고 말이다.



다행히도 '너의 이름은'이라고 당당히 물을 줄 아는 아이, J는 여전히 처음 보는 이를 반갑게 끌어당긴다. 들어온 지 6개월 정도 지난 지금은 여자 동생들의 대모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만화를 좋아한다. 6학년 남학생과 '귀멸의 칼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눈이 초롱초롱하다. 다른 아이들도 이제는 그런 모습에 '오타쿠, 십덕' 이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나는 아이들에게 주말에 뭐 할 거냐고 습관적으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나는 요즘 푹 빠진 드라마 '라켓 소년단 '과 '슬기로운 의사 생활'을 아이들에게 권했다. J는 주말엔 엄마와 그 드라마들을 보았다고 '선생님, 와, 그거 재밌던데요.' 하고 또 호탕하게 웃었다. 유튜브나 게임 같은 대명사 말고 "이번 주말에는 00을 할 거예요."라고 고유명사로 말할 수 있는 고유한 '너(오타쿠otaku, 御宅)'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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